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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탁구의 / 시 / 수필 / 사진 / 일상 입니다

김탁기21

난(蘭) 난(蘭) 향기가 있다는 것은 두고 온 아름다움이 있다는 거지 향기가 깊다는 것은 추억이 그만큼 깊다는 거지 남겨진 빚이 있다는 거지 향기가 난다는 것은 아름다운 간격이 있다는 거지 너와 나 사이에 딱 그만큼 돌아 서 있어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적당한 거리가 있다는 거지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은 그 거리가 멀지는 않다는 거지 아득한 향기 떠오를 듯 말 듯, 벽장에 숨겨놓은 고운 첫 사랑 같은 것이지 어디선가 날아오는 향기 그 향기의 주인공아 아득하구나 2021. 1. 7.
새 마음 새 마음 새해 새 달력이 걸리고 새로운 다이어리를 마련했지 까만 줄만이 처진 새 다이어리 우선 멋지게 연락처를 적어 넣고 이제 한 장 한 장 넘어가겠지 가벼운 메모도 중요한 기록도 보다 중요한 것은 형광펜을 긋고 컬러 간지를 붙이겠지 점차 헤지고 낡겠지만 그만큼 많은 이야기가 담기겠지 세상사는 일이 대충이 있겠어 어느덧 기록에 많이 의지하게 되었군 무난하게 채워졌으면 좋겠지 한 해가 지났을 때 흐뭇하게 돌아보며 던져 버릴 수 있는 것들이 담기기를 기대해 본다 (2021.1.1 경축년 새 날에) 2021. 1. 5.
노루 발자국 노루 발자국 산 너머 가는 오솔길 네가 바람과 별과 함께 다니고 들풀이 슬쩍 길을 터 줬지 토끼와 다람쥐 놀고 구름과 달과 새들도 넘나들던 산 따라 난 꼬불꼬불한 길 이제 네가 다니지 않으니 산비탈에 납작 붙어 있던 그 길도 죽어 허공이 되었네 2020. 12. 21.
나목(裸木) 나목(裸木) 산비탈 언덕에 의연히 서서 상념은 시원히 날려버리고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바람 불면 가슴으로 받아 순순히 휘고 일어선다 푸른 하늘에 편안히 어깨를 내어주고 어떤 간섭도 거부하지 않는, 그 모습 참으로 초연하다 하늘을 향해 가는 팔을 흔들며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무소유를 산다 찾아드는 작은 새들에게 가슴을 내어주고 동네 가운데 서서 소소한 이야기를 빙그레 들어주며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방해하지도 않는다 세상 어떤 소리도 마음껏 들어주는, 그 마음 참으로 넉넉하다 무성했던 여름을 회상하거나 움트던 봄을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발바닥 따스해지고 팔다리 수액 오르면 그들은 기다리지 않아도 기어이 온다 세상사를 거스르는 일이 없는, 그 삶이 참으로 당당하다 바로 너의 모습이다 2020. 12. 17.
간격 간격 네가 보고 싶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싶다 역 앞 느티 그늘에 앉아 너를 기다린다 약속에 먼저 도착했다는 것은 다행한 일 맑은 하늘이 나뭇잎 사이에 가득하다 기차가 덜커덕 지나간다 두 줄을 그으며 먼 산을 돌아간다 가끔은 팽팽히 긴장하기도 하지만 철길은 늘 두런두런 대화하고 마주 본다 이 세상이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는 언제나 균형을 유지하는 딱 그만큼의 힘 우리가 어디에서도 다투지 않는 것은 그만큼의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서산 위로 부풀어 오르는 뭉게구름 다시 그늘에 앉아 기차를 기다린다 사랑하기 때문에 토닥이고 토닥이기 때문에 사람이다 사랑은 기차길 여행이다 2020. 12. 7.
오리 오리 건장한 사내들이 나타났다 사정없이 둘러싸고 포박했다 그리고는 끌고 간다 그들은 저항도 못하고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이 상황을 빠짐없이 다 봤다 어제 비바람 치는 심야에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자유에의 열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 이 적막한 시절에 아름답던 그날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도 모른다 발자국이 선명히 났지만, 치밀하게 지워가며 움직인 것이다 도중 몇은 비바람에 포기하고 주저앉았다 산책을 하다가 한강 유람선 선착장 부근에서의 일이다 2020. 11. 24.
그냥 그냥 그냥 전화했지 할 일도 없고 쓸쓸하기도 외롭기도 했어, 아침에 노란 카펫이 엉덩이를 확 잡아당기더군 비에 젖은 낙엽에 쭐쩍 내동댕이쳐졌어 스산한 바람이 불고 고독감에 소소한 얘깃거리가 필요한 시간이야 쌩하면서도 나긋나긋 따뜻한 얘기 그래 그 작은 마을 그 감나무에 까치밥이 달려 있을까 그 작은 길가에 구절초도 피어 있을까 언덕의 줄줄이 긴 이랑 파란 배추밭은 두런두런 얘기하며 걷고 싶다는 것이지 2020. 11. 22.
문득 문득 그냥 그냥 전화했지 오늘 아침 비에 젖은 낙엽이 쭐쩍 잡아당기더군 보기 좋게 나동그라졌지 문득 처다보니 온통 계절이 깊어졌더군 그 작은 마을 감나무에 까치밥이 달려 있을까 그 작은 길가의 구절초도 피어 있을까 아뜩 그 하늘을 맴돌고 있구먼 가느다란 바람이 휑하니 지나가는 듯하네 뭐 그리 바쁘다고 2020. 11. 21.
이효석과 메밀꽃 필 무렵을 대화하다(2010.1. 여행일기) 이효석과 메밀꽃 필 무렵을 이야기하다.(2010. 1월, 겨울) 선생님 안녕하세요? 몇 년 전, 그러니까……. 이 기념관이 없을 때 들렸었으니까……. 상당히 오래전인 것도 같고, 그동안 주변을 지나쳐 가기도 하고 강원도 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한 번씩 짚어 보았으니 느낌상으로는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도 같습니다. 어떻든 선생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은 너무나 익숙하고 우리 국민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소설 중의 하나가 아닐까요. 저 멀리 펼쳐 진, 지금은 그루터기만 남은 메밀밭인 듯한 언덕과 들을 보았습니다. 메밀꽃이 막 피기 시작할 무렵에는 그야말로 달빛에 온통 소금을 뿌린 듯 눈이 부시겠군요. 어스름한 달빛에 대화 장터을 향해 하얀 메밀밭 길을 걷고 있는 장돌뱅이 세 사람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짐.. 2020. 10.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