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502 흔적 흔적 야트막한 야산 아래 단정한 집에서 텃밭을 가꾸며 풀잎처럼 살아가는 그들은 아름다웠다 사진 한 장, 한 권의 책에 깃든 추억도자신들만의 것이지남겨지는 이의 것은 아니라는 소중했던 물건도 좋은 기억으로 남기려던 한 줄의 글도남겨진 이에게는 그저 지나간 마음일 뿐이라는 물건을 덜고, 생각도 덜고 있다는 그들의 밝고 조용한 말은 장식 없는 빈 마루를 비추며따스하고 풍요로웠다 눈 덮인 연못가 작은 새가 남긴 발자국처럼가볍게 살며 얼음 풀리는 봄날 사르르 스며들 것 같은그들의 미소는 백발만큼이나 맑았고이른 봄의 물빛처럼 투명했다 돌아서는 길가안개꽃 속에 그들의 흔드는 손이 아른거린다 2026. 11. 2. 시월 마지막 휴일에 시월 마지막 휴일에 일렁이는 가을이 곱다 단풍 깊은 휴일에 홀로 방 안에서리모컨을 눌러 본다무료함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침묵에 갇힌 공간 고독의 파도가 밀려온다전화할 곳도 갈 곳도 마땅치 않다온통 바다 한가운데의 섬이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앙상한 가지로 바람을 맞는 나목멀어지는 것들잊혀지는 것들바람은 스쳐가고시간은 낙엽처럼 떨어진다 추억을 되씹으며남아서 팔랑이는 잎 하나 애틋하다 나무늘보는한참을 뜸 들이다가도한 발씩 내딛는데수년이 지나도록 한 걸음도 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22.11.01) 2026. 10. 29. 구도 행각(求道行脚) / 김탁기 구도 행각(求道行脚) / 김탁기 높은 하늘, 푸른 바람 부는 날오대산 깊은 계곡, 천년의 숲을 지나물길을 거슬러 선재동자(善財童子)의구도행각에 든다 선재길을 걸으면참된 나를 찾을 수 있을런지 청아한 물소리, 산새들의 지저귐,소슬한 바람이 동행한다머리는 맑아지고 가슴은 넓어진다숲의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사각거리는 스스로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며한 없이 작아지는 나를 발견한다 모든 집착과 번뇌가 사라지고마음은 가볍고 순수해져발걸음은 더없이 경쾌하다이것이 적멸(寂滅)의 고요일까 고해의 바다인 이 세계가공(空)하고 무상(無常)한 줄을 알아차리는,잠시, 나마저 사라지는 순간이리니 찬란한 폭포 아래에서 세조 임금을 만나다‘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겨 주었다고 말하지 말거라'‘임금께서도 어디 가서 .. 2026. 10. 24. 삶의 중심 삶의 중심 삶의 기준은 언제나 나 자신이어야 한다 남의 삶을 빌려 살지 말 것타인의 그림자에 가려 정작 나를 잃어버리는 날에는 마음 한구석에 허전함만 깊어지리니 그러나 한쪽으로 기울지 말 것 뜻대로 이루어질 때는 흡족하지만조금만 어긋나도서운함이 마음을 흔들지 않던가 나는 누구인가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기만을 바라는 오만이 내 안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겸손의 얼굴을 하고서 남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평화는 나를 있는 그대로 보는솔직한 겸손에서 시작된다 내가 나를 잘못 알고 곧은길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다면 걸음을 멈추고 참된 나를 찾아야 하리 이만큼 세월이 흐르고 나니 인생에서 끝내 소중한 것은움켜쥔 것들이 아니라내려놓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임을 안다 그 .. 2026. 10. 20. 카톡 유감 카톡 유감 내 휴대폰에는 카톡 소리가 나지 않는다 카톡 소리 없는 세상은고요하다그러나 평온한 고요가 아니라누군가 떠난 뒤의 적막 같기도하다 모든 문을 닫아 건 것은 아니다몇 개의 방에서는여전히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계륵 같은 것들열어 보면 소음이고닫아 두면 궁금하다 열어보지 말자 하루 한두 번이면 족하다 그런데도 문득 손이 간다혹시 새로운 소식이라도 그러나 역시 어디선가 퍼온 글 한 편누군가의 끝없는 궤변 조용한 세상을 원하면서방을 아예 나가지는 못한다 어쩌면 귀찮은 것은카톡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놓아버리지 못한사람들인지도 모른다 2026. 10. 16. 마음에 익은 자리 마음에 익은 자리 낯익은 얼굴들이성당 안에 듬성듬성 보인다 한마을에 오래 살다 보니가끔 옛 이웃들이 생각난다동네에서 이웃을 마주치고안부를 나눌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가성당인지도 모른다 오래 다닌 성당에는 나만의 자리가 있다늘 자연스레 앉던 자리눈에 익고 마음에 익은 자리 조금 늦게 도착한 날에는 누군가 먼저 앉아 있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조용히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다요즘 들어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둘보이지 않는다 한 곳에 오래 산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을기억 속에 남겨두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사람이 하나 둘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내가 그곳에 여전히 남아 있음을깨닫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2026. 10. 12. 발자국 발자국 움퍽움퍽한 자국들발자국이하늘에 듬성듬성 떠 있다 풍덩풍덩 냇물을 지나고바람 부는 골목을 지나봉숭아 핀 담장 밑으로 이어진다 꽃 피는 날에도쏴아, 밀려오는 파도어느 곳에 그늘 없을까 없으면 또얼마나 쓸쓸할까 지나온 길은 지워지지 않고봉숭아 빛 발자국 몇 개하늘에 남아 있다 2026. 10. 8. 푸른 꽃 푸른 꽃 달빛도 가라앉은 강가긴 머리를 안개에 씻으며갈대 같은 하늘거림을 치맛자락 깊이 감추고홀연히 찾아왔다 사라져버린여명의 금빛을 쪼개어 물고 가는 작은 새 이슬 하나갓 깨어난 풀잎 위에 놓고 가는얼음처럼 차가운 은빛결핍도 악도 머물지 못하는푸른 세계끝내 피어나지 못한 꽃처럼서늘한 그리움이 되어새벽 강에 잠긴다 2026. 10. 4. 한 마디쯤은 있다 한 마디쯤은 있다 삶이시 월을 건널 때쯤이면들은 것도 많고본 것도 많다 고래 힘줄 같은 고집으로기회를 놓칠세라손을 휘저으며제 생각을 토로한다 거기서 거기인 오랜 친구너 댓 명이 모여막걸리한두 잔을 들다 보면내 말은 맞고 네 생각은 틀리고이편저편제 집에는 금송아지 백록담에는눈이 순한 흰 사슴이 뛰고천지연에는물안개를 뿜는고래만 한 괴물이 산다 일도 많고 말도 많은 인생발자취만큼할 말 한마디쯤은 가지고 산다막걸리에 놓친 고기가 크다 2026. 9. 30. 이전 1 2 3 4 ··· 5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