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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긴글

잊지 못할 복숭아 서리 /김탁기 /자작나무수필 동인지

by 탁구씨 2023. 8. 3.

잊지 못할 복숭아 서리 /김탁기 /자작나무수필 동인지
 

중학교 1~2학년 여름방학 때쯤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동구에서 온종일 물놀이를 하거나, 바위를 건너뛰거나, 땅따먹기를 하며 놀고는 했다. 거의 아침에 나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배가 고프면 그때 집으로 들어가 대충 허겁지겁 먹고 다시 나오고는 한다. 동구는 우리 동네 어귀로 수백 년 된 느티나무와 집채만 한 바위와 넓지는 않지만 암반 위로 흐르는 시내가 있는 곳이다. 여기는 우리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의 피서지이다. 여름이면 애들은 시내를 막아 물웅덩이를 만들어 물놀이를 하고, 어른들은 느티나무 밑 너럭바위 위에서 큰대자로 누워 점심 후의 낮잠을 즐긴다.

그날도 물장구를 치고 자맥질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지치기도 하고, 물놀이를 하다가 보니 춥기도 하여 냇가의 너럭바위에 올라 몸을 말리고 있었다. 그때 아랫동네 어른이 와서 '어젯밤에 아랫마을 복숭아밭을 망친 사람들을 찾는다.'며 '찾아서 경찰서 감방에 가두겠다.'라고 으름장을 놓고 갔다. 아마 우리보다 몇 살 위의 형들이 서리한 모양이다.

그때 갑자기 한 친구가 제안했다.

“우리도 한번 하자.”

우리 또래 중에는 나이가 한 두어 살 많아 엉뚱한 짓을 가끔 하는 친구이다.

“야! 안 돼! 조금 전의 이야기 못 들었어? 잡아서 경찰서 감방에 처넣는다고 했어.”

우리는 처음에 반대했다. 방금 혼을 내놓고 간 후이기도 하고, 사실 우리는 서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는 생각나는 곳이 있다고 했다.

“어젯밤 형들이 했던 곳과 반대편 산 너머 마을로 가면 돼."

"복숭아가 매우 굵고 맛있게 보였어. 주인은 할아버지라서 들켜도 빨리만 뛰면 잡힐 염려가 없어.”

우리는 드디어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전부 일곱 명으로 두 명은 선발대로 과수원에 먼저 도착하여 주인이 있는지 확인한다. 네 명은 본격 공격조로 선발대가 신호하면 함께 복숭아를 딴다. 나머지 한 명은 초병으로 멀리서 사람이 오는지 망을 보기로 했다.

“전부 상의를 벗어 달빛에 사람이 잘 보이지 않도록 하자.”

“벗은 러닝셔츠는 아랫부분을 묶어 복숭아 담을 자루를 만들면 되겠다.”

“잘 익은 것을 알 수가 없으니 그냥 굵은 것만 따자.”

만일의 경우 들키면 절대 잡히지는 말고 각자 알아서 도망갔다가, 바로 오지 말고 한참 시간을 끈 다음에 처음 출발한 장소로 모이기로 했다. 나는 겁이 많다고 하여 길가에서 망을 보는 초병을 담당하게 되었다.

어느덧 하루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전부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다시 모이기로 했다. 가슴이 벌써부터 쾅쾅 뛰었다. 나는 저녁을 후닥닥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약속 장소로 갔다. 일곱 명이 다 모였다. 드디어 원정에 나섰다. 전부 상의를 벗었다. 반바지만 입었으니 거의 발가벗은 상태이다.

달도 희뿌옇게 적당히 밝았다. 처음에는 의기양양하게 각자의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산을 넘어서자 저 멀리 복숭아밭이 어슴푸레 보였다. 그때부터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숨을 죽였다. 우리는 허리를 숙이고 살금살금 가까이 가서 한참 동안 동정을 살폈다. 먼저 두 명의 선발대가 복숭아나무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이어 “짝! 짝!” 약한 손바닥 신호가 왔다. 곧바로 공격조가 복숭아밭으로 기어들어 갔다.

나는 조금 떨어진 나무에 몸을 바짝 붙여 숨기고 망보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

그런데, 어? 어! 저쪽 원두막 부근에 인기척이 느껴지고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아차! 주인이 온 것이다.’ 나는 부랴부랴 “탁! 탁! 탁! 탁!” 손뼉을 있는 대로 크게 쳤다. 우리는 그냥 내 달렸다. 숲이고 도랑이고 논밭이고 가리지 않고 뛰었다. 누군가가 줄기차게 쫓아오는 것을 봤다. 할아버지라고 했는데 아닌 것 같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디쯤에서 따돌리고 나 혼자만 뛰고 있다.

고개를 넘어 마을 가까이 왔다. 그때도 진정이 되지를 않고 가슴이 방망이질했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쫓아오고 있었으니 이제 동네에서는 우리를 찾아다닐지도 모르겠다.

동네 입구에서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살그머니 숨은 곳에서 나와 처음 약속한 곳으로 갔다.

“야! 어떻게 빠져나왔어? 그리고 어떻게 된 거야? 손뼉은 왜 쳤어?”

내가 제일 마지막 도착이다. 다 모여 있었다. 녀석들은 내가 잡혀간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면할 궁리를 하는 중이었다.

나는 상황을 설명했다.

“너희가 올라가고 조금 후에 원두막이 보이는 곳에 주인이 나타났어. 약속대로 손뼉을 쳐서 신호를 보내고 나도 냅다 뛰었지. 그리고 동네 입구 소나무에 숨어 있다가 지금 왔지.”

숨 가쁘게 설명했다. 가슴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그때 처음에 서리하자고 했던 예의 그 친구가 말했다.

“그런데 확실히 봤어?”

그리고 보니 나도 확실치는 않다.

“글쎄 본 것 같다.”

“무슨 그런 말이 있냐? 확실히 본 것은 아니야? 누구 다른 사람들은 주인을 봤어?”

한 친구가 그도 보았다고 했다. 그 친구가 뛰자 주인도 멀리서 악착같이 쫓아왔는데 어디서 따돌렸다고 한다. 그때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원두막 옆에서 급하게 오줌을 누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뛰는 것을 보고 누다 말고 냅다 뛰었지.”

“뭐? 원두막 옆에서……?”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친구가 원두막 부근에서 오줌을 누었다면 내가 주인으로 오인했다는 얘기가 된다. 한 놈이 뛰니 모두가 서로를 주인이 쫓아오는 줄 알고 혼비백산하여 함께 뛴 것이다.

얼 띠기는……!

상황이 이해가 갔다.

“그러니 하지 말자고 했잖아.”

나만 못난 놈이 되는 것 같아 위기를 면하려 역으로 쳤다. 맥이 쭉 빠졌다. 그제야 반바지만 입은 몸에 나뭇가지와 수풀에 스친 상처가 칼에 베인 듯이 아프고 따가웠다. 몇 놈이 저쪽 숲속에서 러닝셔츠로 만든 자루를 찾아왔다. 그 와중에도 이미 서리한 복숭아를 버리지 않고 둘러매고 뛴 놈이 있었다.

“나무 밑에 숨겨두고 그냥 가자. 그리고 내일 만나자.”

우리는 아직 그것을 먹을 만큼 진정되지를 않았다. 집에 가서도 나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풀숲에 스친 상체와 종아리가 쓰리고 아팠지만 아무런 표시도 내지 못하고 그냥 잤다. 이튿날, 혹시 주인이 찾아올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는 별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동구에 모였다. 냇가에 앉아 무용담을 풀어놓으며 복숭아를 마구잡이로 베어 물었다. 맛은 달콤했다. 한 녀석이 말했다.

"내년에 또 하자."

"그래"

"그래"

나도 대답은 했지만 자신은 없다. 사실 그 짜릿한 스릴은 있지만 내심 두 번 할 것은 못 된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이 한 번의 서리는 두고두고 내 일생의 무용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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