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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긴글

80년대 중동 일기

by 탁구씨 2023. 7. 17.

80년대 중동 일기
 

창으로 솜털 같은 구름들이 망망히 펼쳐진다. 처음 타는 비행기이다. 해외업무가 많은 회사에 입사하였으니 해외를 나가보고 싶었다. 어쩌면 이를 위해 직장을 옮긴 것이 아닌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이라고는 처음 와 본 곳으로 생소하고 어리둥절하다. 거기에 어리지만 정규 직원이라고 기능원들을 인솔하여야 하고 회사의 서류 등 소화물도 많다. 출국 절차는 회사의 담당자가 나와 익숙하게 처리하고 필요한 사항을 기계적으로 전달한 후 돌아가 버렸다.

사실 이번 해외근무는 계획과 달랐다. 이렇게 촉박하게 나갈 생각은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 막 첫 애가 태어난 지 몇 개월 되지 않았다. 갓 결혼한 아내나 첫 애에 대한 헤어짐이 아쉬웠고 사실 거주할 집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어쩌면 내가 철이 없어서 어수선한 상태에서 그냥 가족들을 처갓집에 맡기고 결정을 해버렸다.

공항에는 한 친구가 고맙게도 나와 주었다. 그러나 처음 하는 해외 근무에 출국 수속도 회사와의 업무 연락도 가족과의 연락도 한꺼번에 겹쳐 일부러 공항까지 나와 준 친구에게는 고맙다는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출국은 다행히 기능원 중에 몇 차례 해외근무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어 많이 도와주었다. 비행기는 오후에 이륙하였고 처음 타는 비행기라 설렘이 있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창밖을 힐끗힐끗 내다본다. 창밖으로 산과들이 잠시 스쳐 가더니 곧 구름 위로 올라서고 드넓은 하얀 솜 밭을 미끄러져 가는 기분이다. 2~3시간 후에 태국 공항에 도착했고 태국 공항에서 2~3시간을 기다려 사우디행 비행기로 갈아탔다. 그리고 10여 시간을 넘게 비행 한 후 담맘 공항에 도착했다. 담맘시는 사우디의 동북부 페르시아 만에 위치한 도시이다.

도착과 동시에 후끈한 중동의 열기가 밀려온다. 초겨울에 출발 했으니 가볍게 입는다고는 했지만 역시 중동은 중동이다. 그러나 밤이어서 국내에서 듣던 것과 같은 열사는 아니었다. 공항을 나오니 회사에서 직원들이 차를 가지고 나와 있다. 이제 부터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산도 수목도 보이지 않는 어스름한 황무지를 3~4시간을 달렸다. 가끔 저 멀리 폐 유전에서 솟아오르는 불길이 보여 신기했다. 우리의 목적지인 알바틴시에 도착했다. 알바틴은 사우디 북부의 쿠웨이트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도시이다.

사우디는 막대한 유전개발 수익으로 이 부근 황무지에 완전히 새로운 거대 도시를 건설하고 있었고, 우리는 이에 사용할 건설자재를 생산하는 플랜트와 웨르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유명한 벡텔사에서 시작하여 우리 회사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여 이때부터 한국의 위상이 한 단계씩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순간이다.

나의 숙소는 벡텔사의 간부들이 쓰던 곳이라 그냥대로 혼자 사용할 만 했고 도착해서 숨을 돌리기도 전에 생수 등 당장 필요한 물품들을 고교 동기가 보내 주었다. 나도 몰랐지만 마침 고교 동기가 우리 회사에 있었고 그는 오래 전부터 그 지역에 근무하며 나의 발령지를 본 모양이다. 그 외에도 대학동기도 있었고 안면은 없지만 수많은 직원들이 있어서 별로 외로움이나 어색함은 없을 것 같았다.

이튿날 드디어 말로만 듣던 중동 근무가 시작되었다. 숙소에 다른 직원이 데리러 온 차를 타고 황무지를 달려 사무실로 갔다. 끝없는 황무지가 펼쳐진다. 이 지역은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망망하게 펼쳐지는 아프리카의 사막과는 다르다. 가끔 모래 바람이 불 때에는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흙과 작은 돌로 이루어진 넓은 황무지 지대이다. 산은 물론 높은 언덕도 별로 없다. 사무실도 우리가 운영하던 플랜트도 그 망망한 황무지 가운데에 위치한다. 나의 전임자는 이미 책상을 정리하고 귀국한 후였다,

회사가 운영하는 플랜트와 웨르하우스는 관리직과 기능원 포함 수천명이 근무하며 한 변의 길이가 수 킬로에 이르는 정방형의 거대 시설이다.

건물 밖에는 열사의 태양이 쏟아져 자동차 보닛 위에서 계란 프라이를 할 수 있다는 50도를 오르내리는 기온이지만 사무실은 국내와 다름이 없다. 공기가 건조하여 그늘 속에만 들어가면 그리 더위를 심하게 느끼지 않아도 된다.

나는 가끔 근무를 하다가 눈도 쉴 겸 사무실 밖으로 나가 먼 황무지를 바라본다. 망망하게 펼쳐지는 황무지, 저 밖으로 계속 걸어 나가면 무엇을 만나게 될까.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늘 궁금함을 가져 본다. 우리는 잘 닦여진 도로로만 다니고, 우리 부서에 주어진 성능 좋은 차가 있었지만 나는 운전이 서툴러 멀리 나가 보지를 못한다.

어느 날 크게 용기를 내어 걸어보기로 했다. 평소에 걷기를 좋아하고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 발동한 것이다. 도로가 아닌 황무지를 혼자 걸어 나갔다. 길을 잃으면 낭패이기에 직선으로만 갔으니 직선으로만 되돌아오면 될 것이란 계산도 하고 수시로 지형지물을 기억하거나 표시를 하며 걸었다. 돌과 돌 사이로 약간의 언덕을 오르고 내리며 한 두어 시간을 걸었나 보다. 황무지에 식물은 거의 없다. 간혹 버드나무 비슷한 나무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드문드문 말라버린 키 작은 가시 식물들만이 있다. 동물도 있기는 하다. 몇 마리의 야생 당나귀들이 지나가고 모래바닥에 작은 공룡 같기도 한 파충류가 지나가다가 재빠르게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걷다 보면 야자나무가 우거진 오아시스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불가능이다. 그런 곳이 있으면 그 주위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망망한 황무지, 바다에서나 사막에서 홀로 떨어진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약간의 무서움이 엄습한다.

그런데 낭패를 만났다. 조그만 언덕에 올라선 순간 저 계곡 아래에 수 십 마리의 늑대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들의 먹이는 무엇일까. 순간 머리가 쭈뼛해진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을 쳤다. 그들이 보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살금살금 뒤로 걸었다. 백여 미터를 걸은 다음 냅다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넘어 지기도 했다. 그다음 몇 분간은 어떻게 달렸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사무실에 와서 무용담을 늘어놓으니 늑대가 아니며 야생 개떼로 위험하기도 하단다. 그 후로 부터는 혼자 황무지에 절대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 황무지에도 밤에 바라보는 하늘은 역시 매우 아름답다. 희끄무레한 언덕위로 별들이 반짝이며 별 하나 길게 꼬리를 그리며 날아간다.

현지인들은 회사에서 만나보면 성격이 단순하고 친절한 사람들로 보인다. 유학이나 공부를 좀 한 사람들은 매너도 좋고 풍채 좋은 미남이기도 하다. 황무지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석유생산 수익으로 인하여 경제적 자부심은 강하나 문맹률이 높고 먹는 것이나 차림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가난한 유목민 그대로이다.

수십 킬로를 가야 만나는 도시는 우리의 중소도시와 거의 비슷한 정취이다. 단지 외곽의 오래된 집들은 거의가 지붕까지 흙으로 지어진 어설픈 집이다.

부근의 도로는 스피드를 즐기기에 멋지다. 수십 키로가 직선으로 뻗어있다. 차량도 많지 않고 나무나 산이 없으니 속도감도 느낄 수가 없다. 금방 마일게이지에 수십 마일로 달리고 있다. 한참 달리다 보면 가끔 무너진 원주민 마을이나 항무지 가운데 솟아오르는 폐 유전의 불기둥을 볼 수도 있다.

황무지에도 비는 온다. 우기에는 제법 많은 비가 내리며 비가 내린 후에는 중간 중간에 웅덩이도 생기고 며칠 동안은 바짝 마른 것 같던 가시풀이 파랗게 살아난다. 물론 날씨가 개이고 며칠 되지 않아 다시 깡마른 황무지로 변한다.

겨울도 있다. 한번은 얼음을 본적도 있다. 기온으로는 섭씨 0도 정도인데 우리가 느끼는 체감 온도는 국내에서와 비슷한 것 같다. 우리의 체질이 그렇게 바뀌어 버린 것이다.

우리 국민의 뛰어난 머리는 이곳에서도 만만치 않다. 사우디는 술을 먹지 못하는 곳이다. 어느 날 양고기 바비큐에 친구의 초대를 받았다. 저녁을 먹고 은밀하게 숙소로 들어가니 위스키와 막걸리가 있었다. 위스키는 유럽 여행 끝에 짐 속에 가져온 것이라고 하니 이해가 되었는데 막걸리는 뛰어난 기술이다. 건포도와 옥수수에 무엇인가를 넣고 발효를 시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물론 엄청난 불법이다. 어떻게든 할 것은 하고 마는 우리의 발명 근성과 민족정신은 놀라움이다. 맛은 물론 없었지만 엄청 취하기는 했다.

우리의 일과는 숙소로부터 차량으로 4킬로 정도의 사무실로 8시까지 출근 한다. 그리고 정오에 다시 숙소지역으로 와서 점심을 먹고 잠시 오수를 즐긴 다음 다시 출근하여 4시까지 근무를 한다. 그러니 실제 근무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4시에 퇴근을 하면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운동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국내에서 보내 온 TV프로 가요무대가 인기이다. 나는 테니스를 치거나 수영을 한다. 테니스는 엘보가 생겨서 많이 못치고 주로 야외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는데 주변 현지인들이 집에서 수영실력을 보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아 민망스러웠다. 일주일에 한번쯤은 클리닉에서 미국인 의사가 진행하는 회화프로그램에 참석하기도 했는데 나로서는 별 의미가 없었다. 나의 숙소 바로 앞에는 버드나무 비슷한 나무가 한그루 있었는데 아침저녁으로 물을 흠뻑 주는 것도 일과였다. 나무는 매우 많이 자라서 5미터는 되었을 것이다. 삭막한 나라에 내 창문 앞에서 푸른 잎이 출렁이고는 했는데 내가 떠나온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다.

그리 오랜 기간을 근무하지는 않았다. 내가 기대했던 생활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예정기간을 무시하고 휴가차 귀국하여 다시 출국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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