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편지

저녁 편지

 

가끔은 편지가 쓰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컴퓨터 워드로 뚝딱거려 쓰는 편지가 아닌 손으로 꾹꾹 눌러 쓰는 편지 말이다. 손으로 쓰더라도 볼펜이나 손쉬운 필기도구가 아닌 펜이나 만년필로 썼으면 한다.

만년필로 쓴다면 새것이 아닌 오래되어 낡은 것이었으면 더 좋겠다.

적당한 편지지에 손에 익숙한 펜으로 한 단어, 한 문장에 정성을 다해 또박또박 써 내려갈 때 순간의 진실 된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고 사각 거리는 펜끝의 운치도, 성취감도 있을 것이다.

 

손으로 쓰는 글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내용을 잘 못 쓰거나 잉크라도 떨어뜨리는 날이면 낭패다.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 그러니 신중한 글이 되고 사연도 깊어지게 된다.

어떤 때는 매끄럽지 못한 글이 되기도 하겠지만 어느 정도 써 내려간 후에는 다시 쓰기가 쉽지 않으니 이는 오히려 진실 된 글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다. 고치지 않은 그때, 그 순간의 감정이 그대로 살아있게 된다.

내가 아주 친근한 사이로부터 받은 글이 고급스러운 단어로 아주 능숙하고 유려하게 쓰여 진 글이라면 그렇지 않은 때보다 왠지 낯설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받지 않은 것보다 가야 났겠지만 그것은 진실한 사이에 온 글이 아닌 형식적인 글 같은 거리감이 느껴질 것이다.

그러니 손으로 쓰는 편지는 정말 친근하거나 귀한 사이에 주고받는 편지가 될 것이다. 정서적으로 통함이 있는 막역한 사이에 주고받는 편지는 순수함과 멋도 있을 것 같다.

 

그런 글을 써본 기억은 오래되었다.

아마 수 십 년은 되었을 것이다. 학창 시절에 멀리 다른 도회로 유학을 간 친구들에게 편지로 우정을 주고받았고, 고향의 가족들에게 필요에 의하여 편지를 쓰고, 군대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통 때보다는 자주 안부 편지를 쓴 적이 있다.

그 후로는 손 편지는커녕 편지 자체를 쓴 기억이 별로 없다.

아! 그리고 보니 오래전에 직장 생활로 해외 근무를 하며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통신도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기에 안부를 전하고 받을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었다.

모두 순수한 필요와 다감한 감정이 있는 담긴 편지였던 것 같다.

 

그러고는 편지 자체를 잊고 살고 있다.

오래전 지리산 등산 중에 장터목대피소 앞에 있는 빨간 우체통을 봤다. 거기에는 ‘느리게 가는 편지’라는 아주 낭만적이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천왕봉 높은 곳에서 넘실대는 운해를 바라보며, 아니면 새벽에 광활한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장엄하게 떠오르는 일출을 보고 난 후에, 넘치는 감정을 글로 써 우체통에 넣으면 그 속에 기약 없이 쌓여 있다가 기회가 될 때에 귀한 편지가 되어 배달될 것이다.

나도 친구 등 누군가에게 써 볼까 망설이다가 이 상쾌한 지리산에서까지 와서 두뇌를 소모하기는 싫어 단념했었다.

거기서 편지를 썼다면 꽤 낭만적인 글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기억으로 몇 해 전 오대산 산행 중에서의 일이다. 산 깊은 숲속에서 오대산을 중심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자연 생태 보존을 위하여 그곳에서 볼 수 있는 자연 생태 사진엽서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이 엽서를 써 비치된 우체통에 넣으면 훗날 우편으로 보내주는 아주 의미 있고 재미있는 행사였다.

나와 동행한 아내는 넘어진 고사목 위에 걸터앉아, 사실은 집으로 오는 편지가 되겠지만 각자 아이들에게 엽서를 한 장씩 써서 붙였다. 이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정말 집으로 깜짝 배달되어 왔다.

아마 몇 개월이 지난 후였던 것 같다.

그 엽서는 상당한 추억거리이기에 아직도 냉장고 벽에 붙어 있다. 손으로 쓰는 편지는 이런 놀랍고 정겨운 느낌이 있다.

 

때로는 손으로 쓰는 편지가 격식을 차려야 하는 경우나 업무상으로도 아주 요긴하게 쓰이는 글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아마 관심을 가지고 성의를 다하고 있음을 보여 주려는 약간은 목적적인 글이 되지 않을까도 생각해 본다.

오래전 업무상 해외여행이 잦은 어떤 분에게 각별한 부탁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직접 만날 시간이 마땅치 않아 부근의 조언을 받아들여 동행한 사람 편에 직접 글로 써서 보냈다.

장시간의 비행기 여행에서 천천히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조언이었다. 밤새워 여러 장의 편지를 썼다. 이미 컴퓨터 워드가 습관화된 상태라 쉽지가 않았다.

그 편지는 결과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아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지만 부근의 조언은 일리가 있었고, 이런 경우 손으로 쓰는 글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는 것에는 적극 동의한다.

 

그런데 사실 손으로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장 생각나는 일이 있다.

어쩌면 이 글, 손으로 쓰는 편지를 생각하게 된 동기인지도 모르겠다. 수년 전 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친한 친구로 부터이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 반가움과 함께 ‘무슨 일일까?’ ‘웬일일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다.

이 친구는 탄탄한 직장에 근무를 하다가 외환위기 무렵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실패하고 매우 어려운 과정을 겪어오고 있었다.

전화로 소식은 들은 후, 핑계를 대자면 바쁘다는 것으로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고,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 같다.

편지를 뜯는 순간 ‘나다.’로 시작되는 그 친구 특유의 편안함과 능청스러움에 안심과 정말 허물없는 웃음을 짓게 했다. 아니, 어쩌면 어려운 가운데에도 일부터 능청을 떨며 여유롭게 안부의 편지를 보내 주었는지도 모른다.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끼며 반가움에 우선 전화부터 들었다.

전화의 편리함이기는 하지만, 그 이후 생각해 보니 답장을 손으로 써 주지 못하였음에 늘 미안함을 가지게 되었다.

 

이 생각이 나서인지 문득 손으로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안부를 또박또박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실 그런 글을 보낼 만한 곳도 많지 않다. 요즘같이 편리한 시대에 편지를 이야기한다는 것도 낡은 사고일 것 같고, 거기에다 손으로 편지를 쓴다는 것은 단순히 추억 속에서나 있을 낭만이나 허세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손으로 편지를 써보고 싶다. 차분히 마음을 담아 안부를 전해보고 싶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장으로 손으로 쓴 편지를 받아보고 싶다. 바쁘게만 돌아가는 이 시대에 조금은 천천히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