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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긴글

유난히 길었던 하교

by 탁구씨 2021. 12. 1.

유난히 길었던 하교

 

하교 길이 실재로 유난히 길었던 어떤 날의 이야기이다.

중학교 다닐 때까지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엄청난 산골 마을에서 다니고 고등학교는 대도시로 나가게 되었다. 대도시로 가본 경험은 친척 방문이라도 전혀 없다. 오로지 고교 진학을 위해서 갑자기 결정을 하게 되었고 나름 어려운 시험을 거쳐 도시로 진학을 하게 된 것이다.

도시에 작은 누님이 살고 있었기에 이를 연고로 진학지역을 결정했고 우선은 누님 댁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도시에서의 생활은 즐비한 건축물과 많은 차량, 환한 네온 간판 등은 차치하고라도 가장 큰 변화는 등하교 방법이었다. 집 앞에서 학교 앞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기에 주로 시내버스를 타고 다녔다. 누님 댁으로부터 학교는 버스로 약 한 시간 정도의 거리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버스요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부터 골목길을 꼬불꼬불 가로 질러 걸으면 버스 보다 약 20분 정도 더 걸린다. 시골에서 초, 중학교를 다닐 때에는 더 어린 나이이고 거리도 훨씬 더 먼 곳을 걸어서 다녔는데 버스를 타나 걸어가나 걸리는 시간은 비슷하고 또한 걸으면서 보는 도회 전경이 재미있어서 버스를 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로부터 가끔씩 버스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였다. 문제는 어느 여름날이었다. 거의 매일 수업을 마치고 교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늦게 집으로 가고는 했는데 이날은 도서관을 나서니 솔솔 부는 바람이 매우 좋았다. 그래서 한번 방향을 바꿔 다른 길로 가보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저 멀리 붉은 벽돌로 된 성당의 종탑이 보이고는 했는데 성당을 가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매우 궁금했고 늘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대충 집으로 가는 길을 어림해보니 학교에서 계속 직진하면 성당이 나올 것이고 거기 어디쯤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걸으면 집 가까이의 Y대학교가 나올 것 같았다. Y대학교는 우리 집 가까이 언덕 위에 있는 매우 넓은 규모의 학교이다. 적어도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 도서관에서 나온 시간이 아마 학교 도서관 종료 시간인 저녁 9시쯤 되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냅다 성당 종탑 방향으로 걸었다. 물론 밤이라 종탑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 후 충분히 걸어 그 근처까지 온 것 같은데 종탑이 보이지 않았다. 방향이 조금 어긋난 것 같아 대각선으로 방향을 바꿔 좀 더 빠르게 걸었다. 그러나 한참을 걸어도 내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오래된 붉은 벽돌의 종탑이 나오지 않았다. 한 시간 이상은 걸은 듯하고 밤은 깊어 졌으며 도로에 차량들도 사람들도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마음이 급해지고 그렇다면 내가 갈 곳이 도시의 남쪽이었으니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한 참을 걸으면 부근의 가장 큰 지형물인 Y대학이 안 나오고 배길 것이냐는 계산이 나왔다.

다시 남쪽을 향하여 냅다 달리듯이 걷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잘 물어보지도 못하는 소극적인 성격이라 그냥 걷기만 했던 것 같다. 드디어 통금 시간이 지나고 있고 주변 가게는 물론 길에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겨우 사람들을 만나 길을 물어 보았으나 아무도 자세한 길을 가르쳐 주지는 못했다.

한참을 걷고 또 걷고 남쪽으로 가다가 너무 온 것 같아 이번에는 다시 동쪽으로 꺾어 걷고 또 걸었다. 이미 도시는 차량도 인적도 없고 가로등만이 희미했다. 말로만 듣던 야간 통행금지 순찰을 피해 골목길로 숨어가며 두어 시간 그러니까 네다섯 시간 정도를 걸은 것 같다.

온 몸이 흥건히 땀으로 젖은 그 시간, 드디어 Y대학 이정표를 발견했다. 그 대학 간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집 근처라 수시로 그 대학 캠퍼스에서 놀기도 했지만 이러 이러한 사유로 그 대학에 대한 느낌은 남다르다. 마치 우리 학교보다도 더 친근감을 느낀다.

이리하여 나는 하교를 도회의 밤길 5시간 정도를 걸었다. 아마 그 도시의 남쪽 일대를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맨 것 같다. 정말 촌놈의 역할을 단단히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워낙 시골에서 자랐으며 또한 시골에서 버스를 타며 등하교를 해보지 않았으니 돈을 아껴야겠다는 것과 지금도 그렇지만 새로운 문물을 보면 꼭 확인해 보고 싶고, 새로운 길은 꼭 가보고 싶은 호기심, 그리고 아직 아무 것도 겁나는 것이 없던 자신감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행히 누님 집에서는 내가 친구들과 지내고 있는 정도로 생각하고 큰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다. 워낙 전화 같은 것도 없던 시절이었고 공중전화 같은 것은 그 때는 나로서는 신문화라 미처 생각조차 못했던 것 같다.

그런 내가 그 도시에서 학교 전 과정을 마치고 군 생활도 그 도시 근교에서 복무하였으며 첫 직장 근무지도 그 도시였다.

그런데 인생이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것. 군 전역을 앞두고 신문을 보다가 우연히 눈에 띈 사원모집 공고문을 보고 공채로 입사하여 서울로 올라왔고 강변 이곳에 자리한 것이 수십 년, 내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다. 누가 어디 출신이냐고 물으면 나는 예의 그 도시를 말하고는 하지만 사실 나의 가장 오래된 근거지는 당연 서울 이곳이다.

문득 되돌아보니 지난날들이 하나의 추억이 되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