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침묵에서 깨어나
서랍 속 오래된 손목시계의 태엽을 감으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착착착 소리를 내며 바늘이 돌아간다.
이 시계는 수년 동안 서랍 속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잠시 잠을 자다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 듯 태연히 일을 시작한다.
마치 낮잠을 한숨 자고 난 후 그동안에 마른 빨래를 앞으로 당겨 하나하나 가지런히 개고 있는 중년 여인네 같다.
이 시계는 그동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꽃피고 비 오고 단풍 들고 눈 내리는 수많은 시간의 반복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태엽이 오랜 시간, 수 십 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한 번에 연결시켜 주어 버렸다.
어느 봄날 떨리는 손으로 나의 손목에 채워주던 아내는 어느덧 중년을 지나 머리에 은빛이 검은 빛보다 많고 나의 성긴 머리카락 속으로는 바람이 술술 지나간다.
그 사이 딸, 아들 태어나 언제부터인가부터는 성인 축에 들었다고 하고, 그때 주름진 얼굴로 지켜 봐 주시던 양가의 아이들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제 하늘에 계신다.
이 시계는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늘 내 손목에 있었다.
이 곳 저곳 우리와 함께 다녔고, 나의 직장을 따라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몇 년은 바다건너 이역만리 타국에서도 항상 내 손목에 있었다.
서랍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은 핸드폰이 나오고부터이다.
또 다른 문명으로 늘 함께 있게 된 핸드폰에 밀려 잠시 별거가 시작된 것이다.
이 시계는 서랍 속으로 들어갔고 꽃 피고 새우는 봄을,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내리는 많은 세월을 외면한 체 서랍 속에서 잠을 잤다.
아마 그래서 이 시계는 세월을 모를 것이다.
수년 전의 그 시간에서 다시 지금의 시간으로 돌아왔지만 태연히 짐짓 모르는 척 바늘이 돌아가고 있다.
시간은 추억과 향수를 만들고 추억은 사람의 마음을 예전으로 돌리는 것인가.
어느 날 다시 핸드폰 대신 옛날처럼 시계를 차고 싶었다.
그것도 가벼워 보이는 디지털시계 말고 밥을 주거나 흔들어야 되는 오래된 아날로그로 말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어느 기념일에 새로운 시계를 사 주었고, 나는 그와 함께 옛날 그 시계가 생각이나 깊은 서랍 속에서 찾아 태엽을 감으니 착착착 소리를 내며 능청스러우리 마치 태연하게 돌아간다.
가끔은 옛날을 회상하고 더듬어 보는 것도 기쁨이다.
이제 나는 이 시계들을 교대로 차며 과거와 현재를 건너다닐 것이다.
그러나 사실 시계는 과거와 현재가 따로 없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고 시계는 착착착 경쾌한 소리를 내며 한결 같이 두바퀴씩 돌아간다.
나도 아내도 세월이 흘렀음을 의식하지 말고 그냥 한결같은 마음, 한결같은 모습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그 세월이 서른 해는 되었으니 우리 나이도 이제 한 서른은 넘었지 아마.
(2016. 5월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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