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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긴글

우리 동네

by 탁구씨 2020. 2. 22.

회색의 도심 속, 오래되어 푸른 마을

 

 

어른 팔로 두세 아름은 될 만한 메타스퀘어가 울창하게 서 있고, 봄에는 벚꽃이 터널을 이루며, 가을에는 은행나무가 온통 마을을 노란색으로 물들인다. 뿐만 아니라 계절마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고, 집 앞 잔디밭은 넓고 가지런하여 잘 관리된 잔디구장을 방불케 한다.

어느 수목원이나 영화속에서의 주택단지, 혹은 잘 단장된 공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울 시내 복판, 회색의 도심 속에 오래되어 푸른 동네가 있다.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동네를 좋아한다. 보통 자신의 동네를  ‘살기에 정말 편 한 곳이며 아쉬움이 별로 없는 곳’이라고들 한다. 자신이 환경에 길들여지기 때문인 듯하다.

나 역시 이 한 곳에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러니 이곳이 좋은 곳이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할 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꼭 오래 살아서만은 아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가 정말 좋아서 그냥 눌러 앉아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랑이고, 어떻게 보면 자랑도 되겠다.

뒤로는 한강이 흐르고 앞으로는 가까이 호수가 있으며 멀지 않은 곳에 대표적인 종합스포츠 시설과 수십만평의 넓은 공원이 있다. 또한 초대형 쇼핑 레저시설이 있고, 물론 도서관이나 공연장도 있다. 교통 또한 정말 좋다. 이쯤 되면 어디인지 짐작이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곳에 수십 년을 살아오고 있다. 한 때에는 이사를 자주하는 사람이 이재 감각이 있다는 말도 있었다. 집값이 올라갈 곳을 찾아 넓이를 키워가며 옮겨 다니면 재산이 불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재테크에 감각이 무디어서인지 용기가 없어서 인지 그냥 눌러 앉아 있었다.

 

사실 나는 이런 것 보다가는 내가 좋아하는 곳, 사람냄새가 나는 곳, 무엇보다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곳에 살기로 했다. 우리 아이들은 이곳에서 성장 했다. 아이들은 단지 내 수영장에서의 유아시기를 시작으로 모든 학교를 이곳에서 다니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기까지 이 동네에서 보내고 있다.

그들이 성장하던 모습이 눈에 보인다. 놀이터에서 놀던 모습도, 스포츠센터 수영장에서 유아 수영을 배우던 모습도, 초등학교에서 뛰어다니던 모습도 보인다. 아내는 하교시간 쯤에 창밖을 내다보며 학교에서 막 뛰어오는 아이들을 기다리는 시간이 참 행복했었다고 한다.

예민한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그 또래에 있는 갈등의 시간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조금 더 잘 해줬어야 하는데, 사회생활이나 성격상 두 번 오지 못하는 그 시간을 제대로 함께 해주지 못한 것은 항상 마음에 걸린다. 이 모두가 이 동네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그들도 자신들이 좋아하는 나무숲이 있다. 학교를 갈 때에는 어느 길로 가고, 하교는 어느 숲으로 하며, 친구들과 놀 때에는 주로 어느 놀이터, 어느 숲에서 논다는 것들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마을 곳곳의 특정 나무들에 대한 추억도 있는 듯하다.

사실 나 역시 그렇다. 차를 가지고 하는 출퇴근이야 어쩔 수 없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에는 그날마다 걷고 싶은 길이 있다.

봄에는 벚꽃 길을, 여름에는 무성한 메타스퀘어 길을, 가을에는 은행나무 길을 주로 걷고, 좀 더 여유가 있는 날은 단지 가운데의 키작은 나무숲 길을 골라가며 걷는다.

그리고 사진이 잘 나오는 포토 존은 어디이며, 유달리 크기가 큰 나무는 어디에 있으며, 단풍이 아름다운 나무가 있는 곳은 어디라는 것을 안다.

적어도 한동네에서 수십 년을 살아오자면 많은 추억과 이유들이 있겠지만 나는 주로 숲에 대한 추억들이 많다.

단지 내의 숲과 단지 밖의 한강은 나의 숨통을 틔워주는 곳이다. 복잡하고 생각이 잘 안 풀릴 때에는 거의 3km는 됨직한 단지 내의 산책로를 돌거나 한강으로 나가 걷거나 달린다. 한참 걷고, 뛰고 나면 흘리는 땀과 함께 무거운 잡념들이 빠져 나가 버린다.

물론 이곳에서 좋은 일들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환경과 관련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곳이 재건축된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재건축에는 찬성한다. 건축물도 오랜 세월을 지내고보니 이곳저곳에 탈이 날 때도 되었고, 나도 새롭고 깨끗한 곳에 한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좋은 자연 환경이 살아진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크다. 

재건축 진행에 시간이 걸리면서 동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수목들이 크기는 있으되 관리를 하지 않아 제멋대로의 노목이 되었다. 그 넓고 아름답던 잔디밭도 풀이 무성하다. 또한 몇 년 전 태풍 때에는 많은 나무들이 넘어졌다. 관리사무소에서는 그것을 사정없이 잘라버렸다. 재건축이 전제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잘라 놓은 나무 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보니 가슴이 저렸다.

오늘도 그 사이 길을 걷다가 저기쯤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몇그루나 있었지?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휑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아직도 시내 주거 단지로는 쉽게 볼 수 없을 정도로 수목이 울창하고, 나름 한편으로는 관리를 하지 않은 상태가 생태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것도 같아  또 다른 운치가 기대되기도 한다.

 

 

 

수십 년의 세월은 인생으로 봐서는 보통의 시간이 아니다. 내 인생의 황금기를 거의 여기서 보냈다. 그래서 이 동네를 쉽게 저버릴 수가 없다. 흔히들 대규모 재건축단지로 떠들석하니 집값이 많이 올라 돈을 벌었지 않았느냐고 한다.

하지만 돈을 벌려면 옛날에 자주 이사를 다녔겠지! 수십 년을 살아왔고, 정말 경제적인 이유로서의 소유가 아니라 그냥 익숙하게 살고 있는 거주로서의 집이다.

혹자는 '낡은 집에 불편을 감수하며 사는 것이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팔고 좀더 쾌적한 주택으로 가는 것은 어떠냐’고도 한다.

그러나 내 인생의 가장 귀한 시간들, 그간의 사연과 추억들은 그리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었다면 내 살아온 과정의 덤일 뿐이다.

우리 동네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다. 오랜 세월을 같이 살아왔다. 나는 우리 동네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 동네에 살고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 당연히 이해타산을 떠나서이다. (2020.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