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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긴글

늦은 겨울 밤에 생각나는 사람들

by 탁구씨 2019. 12. 4.


  춥지 않은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을씨년스러운 겨울밤, 

 "카-톡" 하고 [소주 한 병과 간단한 안주 한 접시]의 사진이 날아온다.

소주잔이 하나인 것은 혼자 마신다는 뜻이고, 이는 곧 ‘내가 쓸쓸히 너를 생각하며 소주나 한잔하고 있다’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겠지.

그래, 이 겨울 늦은 밤에 나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내가 답신을 보내지 않아도 내가 읽었다는 사실은 알 것이고, 이 하나만으로도 그도 어느 정도의 외로움이 해소 되었을 것이다.

이 스산한 겨울밤의 바람소리 속에서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것도, 또 누군가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도, 그나마 훈훈한 정이 있는 세상임을 알려 준다.

이러한 사실이 나이 들어갈수록 세상이 삭막해지고 외로움이 몰려오지만 그래도 얼마간은 이 세상이 살만 하다는 것을 느끼게도 한다. 

 

  문득 눈을 감고 두 손을 가볍게 모은 후 편안한 의자에 깊숙이 앉아본다.

긴장이 풀리며 조용한 시간이다. 겨울밤의 책상 앞은 참으로 편안하다.

바깥 날씨가 찰수록, 밤이 어두울수록, 주변이 고요할수록 스탠드 밑에 조용히 앉아 있는 순간은 매우 편안하다.

차분히 추억들이 되살아나고 많은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어린 시절에도 찬바람이 쌩쌩 부는 날 호롱불을 켜 놓고 책상에 앉아 있으면 참 안온했다. 가벼운 바람소리가 문풍지를 흔들기도 하고 간혹은 밤에 활동하는 올빼미가 사랑방 옆 감나무 꼭대기에 앉아 특유의 소리로 울기도 한다.

아버지는 이웃집에 밤나들이를 나가시고 어머니는 별로 할 일이 없는 겨울철이라 안방 호롱불 밑에서 양말을 꿰매고 계신다. 이제는 두 분 모두 계시지 않는다. 나는 불혹에 고아가 되었다.

 

  6-70년대, 우리 동네에는 동갑내기가 유달리 많았다.

논밭을 뛰어다니며 자치기를 하고 밤에는 누군가의 집에 모여앉아 조잘 되고는 했다. 지금은 모두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몇 명을 제외하고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넓기만 했던 초등학교 운동장과 친구들, 안경잡이 담임선생님, 오랫동안 꿈속에서까지 좋아 했지만 말도 걸어보지 못한 여자 동급생, 그게 첫사랑이었을까?

중학생일 때에 나는 제 딴에 폼을 잡는다고 나팔바지를 입기도 했지. 그래도 그때의 친구들이 가장 많이 생각난다. 

우리는 비슷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모두 착하고 성실한 친구들이며 사회에서도 그 나름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딱히 학교생활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이 친구들에게서 느낀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관계성이라는 것을 크게 느끼는 것도 이 친구들에서 이다.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에 삐거덕 거리는 마루로 된 고등학교는 지금은 졸업횟수가 100회는 되었겠구나.

교문을 나서면 오래된 기와집들이 즐비하고 그 좁은 골목 안에서 자취를 하기도 했지. 우리는 경쟁적으로 학교와 학원, 도서관으로 다니며 공부는 꽤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야구 명문 고교라 야구장으로 우르르 몰려가기도 했지.

졸업 후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가 많은 세월이 흐르고,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생긴 후부터 겨우 연락이 닿아 그때의 끈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 이런저런 사정으로 연락이 되지 않은  친구들, 지금 이 순간은 그 친구들이 보고 싶다. 집 부근에 살며 함께 앞산을 오르내리던 식이는 외국으로 갔다고 했던가? 

그는 단어장 대신 성경 구절을 외우며 다니고는 했지. 아마 목사나 의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공이란 무엇일까? 행복이라거나 인간답게 산다는 것과는 어떻게 다를까? 이제야 그런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대학에서는 고교 선배이기도 했던 학과장이 생각나고 서른 남짓한 과 친구들이 드문드문 생각난다. 

특히 친했던 서너 명만 연락은 하지만 자주 만나지는 못하고, 그 외에는 소식이 끊겨 아쉬움이 있다. 직장생활과 병행한 야간대학이기에 유대가 좀 약한 듯 하다.

그중 늘 가까이에서 환하게 웃어주던 아름다운 여인도 있었지. 이 여인은 또한 어디에 살고 있을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한 이 숙녀는 특히 웃는 모습이 예쁘고 퍽 세련되었던 것 같다.

내가 학창시절을 통하여 진짜 좋아했던 여자 친구가 있었을까?

   

  이 순간에 기억나는 사람들에는 군 생활도 빼 놓을 수 없지.

훈련 동기이며 자대 동기인 손 병장과 이 병장. 체구는 작지만 당차고 요령이 좋은 손 일병과 사람 좋고 매사에 있는 듯 없는 듯 잘도 넘어가는 부산 사람 이 일병이었지.

호된 군 생활 중에 서로 의지하며 많은 도움이 되고는 했다. 우리는 일요일에 선임을 피하여 부대 내의 불교 법당으로 도피하기도 했지.

그리고 많은 선후배 사병들, 우리는 그때 ‘너희는 인간이 아니야 그저 국가 소유의 관물일 뿐이지’ 라는 말을 들으며 거의 인간이기를 포기한 진짜 인간들이었지.

그때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지금은 모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하지만 그 인연들이 뿔뿔이 흩어져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함은 씁쓸한 아쉬움이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합격하고 홀가분할 그 무렵, 서울에서 깡촌인 우리 동네 친척집을 다니러 왔다가 밤 세워 문학과 장래를 논하던 한 친구가 있었지.

우리는 그 후 대학 학보에서 우연히 만나고 다시 연락이 끊어졌다가 지천명에 어느 날 우연히 또 연락이 되어 다시 문학과 인생을 논하는 인연이 되었지.

그래 이런 것을 인연이라고 하는 걸 거야. 이런 것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축복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관계에서 좋고 애틋한 것만 있을까?

때로는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로 고통을 느끼거나 배신감에 분노하는 때도 있겠지.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해볼까 하던 때에 그럴 수 없는 배신을 당한 적이 있지. 억제할 수 없는 분노에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지.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 전혀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거지. 스스로의 학대였던 것이다.

사실 배신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입장의 차이일 수도 있다. 산다는 것은 본의 아니게 남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을 것이고 그 누군가가 나도 모르게 나에게서도 그런 느낌을 가졌을 런지도 모른다.

모든 면에서 내가 보는 타인이, 타인이 보는 나일 수도 있다.

심한 마음의 단련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찾아 온 나름의 교훈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도 생각나는 사람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을 떠나서 살수 없다. 더불어 사는 세상, 인간인 이상 우리는 서로 부대끼며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내일도 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들은 그저 내 곁을 지나가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 또한 그들 곁을 지나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의 모습에서 내 자신을 본다.    


내고향 용바우 - 50여가구에서 지금은 10여가구도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