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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긴글

오대산 산행을 하며 두런두런 대화를 하다

by 탁구씨 2019. 10. 21.

 오늘 오대산 단풍 산행을 했지요. 이때쯤이면 의례히 오대산 단풍이 최고이고 이로부터 차츰 남하하여 약 보름 후에는 내장산에서도 그 절정을 이루고, 계속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지요. 그런데 오늘 막상 산을 올라 보니 잎들이 미처 단풍이 들기도 전에 말라 버려 녹음은 아니지만 ‘오메 단풍 들겠네!’ 의 그 불타는 맛은 느낄 수 가 없더군요. 기후 온난화로 요즘은 절기를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은 어떤 에세이 작가와 함께 걷는 산행이 되었습니다. 다수의 작품을 쓰신 작가라 나와 대등한 대화가 될 수 는 없겠지만 몇 번인가 산행을 동행하여 거리감이 없어지기도 하고, 정서적으로도 비슷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두런두런하며 오르노라니 길고 험한 산행이 조금은 가벼워졌습니다.

 숨이 턱에 닫거나 단풍이 절정인 곳에서는 산행 특유의 터프함으로 털썩 주저앉아, 산을, 그 산속에서 살아가던 옛 사람을, 그리고 지금도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들을 허물없이 나누었습니다. 이분은 원래 전공이 사학으로 오랜 세월을 학생들과 함께하여 역사에 해박할 터이지만 일체 내색하지 않고 달관한 듯 거침없이 유머를 내뱉는 모습에서 퍽이나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분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대산은 느낌이 있는 산입니다. ‘월정대가람’이라는 현판의 월정사 일주문을 넘어서면 하늘을 찌르는 울창한 전나무 숲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전나무 향이 입안에 달콤하게 퍼지며 가슴을 맑게 합니다. 몇 발자국 걷지 않아 천년 숲 기운에 숙연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요. 사위는 고요하며 자신의 발자국 소리조차 소음인 것 같아 신발을 벗어 들게 합니다. 전나무 숲과 연결되는 고찰 월정사도 맑고 깨끗한 사찰입니다. 가람이 오대산 품안에 아늑히 자리하고 있으며 반면 마당은 넓어 시원스럽습니다. 마당에는 팔각 9층 석탑이 웅장하면서도 우아하게 서 있고, 그 앞에는 석조보살좌상이 오른쪽 무릎을 꿇고 경건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 모든 배치가 매우 편안하고 아름답습니다.

 

 계속하여 이어지는 선재 길은 계곡을 따라 맑은 물과 단풍과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경쾌함에 극치를 느끼게 합니다. 이 길을 따라 걷노라면 모든 근심은 사라지고 마음은 가볍고 순수해저 어느덧 스스로가 구도의 길을 걷는 선재동자가 됨을 느끼게 됩니다. 마침 맑은 계곡물에 떨어진 빨간 단풍잎이 가슴에 한 점을 찍습니다. 동자의 깨달음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선재 길 산책은 상원사에서 끝납니다. 무려 9km의 거리이지만 힘들거나 지루함을 느낄 여가가 없습니다. 내게 있어서 오대산의 정점은 상원사입니다. 산 중턱에 높이 자리한 상원사는 고즈넉하면서도 시원스런 정취가 있습니다. 문수전 마당 끝에 서면 우람하면서도 부드러운 오대산 능선이 비슷한 눈높이로 마주 보이며 매우 편안하고 평화롭게 펼쳐집니다. 여름에는 운해가 감아 돌고, 가을이면 단풍이, 겨울에는 설경이 아름답습니다.

 

 오늘의 산행은 비로봉까지입니다. 상원사를 지나 가파른 숨을 몰아쉬다가 보면 비스듬한 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가람 다섯 동을 층층이 건축한 ‘중대사자암’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땀을 닦고 산행을 계속하면 상원사 ‘적멸보궁’에 다다릅니다. 상원사에서 1,5km 정도이며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입니다. 법당과 작은 비석하나가 소박하게 서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원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겠지요.

 

 여기서 조금 더 가파른 코스를 오르면 비로봉 정상입니다. 정상에서 시야를 멀리하면 가슴은 넓어지고 머리는 한없이 맑아지며 새로운 기운이 솟구칩니다. 반면 장대한 자연 앞에 작아지고 겸허해지는 자신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가을 산행은 단풍이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계절을 느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단풍나무 그 고유의 붉은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잡목들이 자신을 태워 최후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으며 산이 전체적으로는 불그스레하여 단풍의 계절임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선선한 바람도, 푸르고 높은 하늘도, 가을을 느끼기에는 아쉬움이 없었습니다. 가을은 경쾌하고 높은 계절입니다. 우리는 이 가을에서 풍요를 느낍니다. 이제 며칠 더 지나면 한 해의 부족하고 어리석음을 날려 보내며 단단하게 마무리하고 또 다가올 새로운 계절을 엿보게 될 것입니다.

 

 산을 내려오며 에세이 작가는 지금이 인생의 어느 때 쯤으로 생각하느냐? 고 물어왔습니다. 그는 이제 우리는 인생의 저녁을 살고 있으며 마치 모두 백세를 살 것처럼 허욕을 부리고 있는 사람들이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 아름답고도 경건한 산을 걸으면서 숙연한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현실에 만족하며, 또 주위를 배려하며 살자는 것 이지요. 여기서 욕심은 경제적인 것이나 명예를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니고 건강이나 일상의 모든 경우를 이야기 하는 것이고요.

이제 우리세대는 하루의 늦은 오후이며 한 해의 가을쯤에 와있다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동안의 삶을 차분히 뒤 돌아보며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며 후회 하자는 뜻은 당연히 아니고요. 현재를 즐겁게만 살자는 뜻도 아닐 것입니다. 조용히 그동안 살아온 세월을 바탕으로 의미 있고 여유롭게 살며, 자신을 희생하거나 지나치게 억제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모바일로 보여주는 에세이 중에 ‘땅 따먹기’라는 것이 있더군요. 어릴 때 땅 바닥에 납작한 돌멩이를 엄지나 검지로 퉁겨 돌멩이가 확보하는 만큼 영역을 넓혀가는 놀이를 말하는 듯합니다. 놀이 과정에서 조금 더 확보하려 싸우듯 하다가 어둠이 내리면 모든 것을 팽개치고 처음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비교한 이야기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인생의 시계 바늘이 하루의 지는 해를 가리키고 있든, 한해가 마감이 되든 그 어떤 순간에도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희생하지는 말며 조금은 아쉬움이 적을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 작가의 ‘땅따먹기’와는 비슷한 놀이가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 '모래성 허물기'를 하는 놀이가 있었지요? 모래를 높이 쌓아 놓고 가운데에 막대기를 세운다음, 교대로 조금씩 모래를 당겨 성을 허물어 갑니다. 이 게임에서도 욕심을 부리면 막대기가 쓸어져 지게 됩니다. 과욕을 부리면 오히려 화가 되지요.

요즘 졸부라고 하던가요? 어떻게 갑자기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자신에 도취하여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물론 자신은 열심히 살아온 결과라고도 말하겠지만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자만하며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 말입니다. 세상은 혼자 이루어 질수 없지요. 또한 세상의 흐름은 야박하여 자칫하면 모래가 무너지고 탑이 넘어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늘 듣고 또 하는 이야기이지만 항상 겸손하게 매사에 감사하며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야함을 느낍니다. 일상을 건실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요. 세상은 항상 똑 같은 방향으로만 흐르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기복이 있게 마련이지요. 늘 변함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단풍들고 깊어가는 가을날에 오대산의 천년 고찰 월정사와 그 산을 두런두런 걷다가보니 자신을 돌아보는 숙연한 시간도 되었습니다. (2019. 10. 21일 산행)

 

 

 

* 적멸보궁 : 모든 번뇌가 남김없이 소멸되어 고요해진 열반의 상태로 보배같이 귀한 궁전, 즉 마음의 흔들림이 없고 번뇌가 없는 보배스러운 궁전이라는 뜻으로,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여 부처님을 모시지 않으며 한반도에는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정선 정암사, 영월 법흥사, 양산 통도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