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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olic & Family

나의 아버지!

by 탁구씨 2011. 2. 2.

나의 아버지

 

나는 우리 집안을 참 좋아한다. 상당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 가문이 가끔 미디어를 통하여 전통적 유교 집안으로, 또 역사적 인물을 많이 배출한 집안으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직계가 아닌 종친의 이야기이니 그 보다가는 나는 나의 아버지를 존경하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한 농부였다. 그러나 완전 무지렁이 농사꾼은 아니고 단순히 농사를 짓고는 있지만 한학을 하고 분명한 의식을 가진 참 어른이셨다고 표현하고 싶다. 새벽부터 밤까지 농사일에 몰두하셨지만 나름의 자존감을 잃지 않은 분이셨고 누가 뭐라고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사신 분이셨다.

평소 별 말씀을 하시지는 않으셨지만 본인의 소신을 확실히 하셨고 정황으로 볼 때 당시에 그저 농촌에 살고 있는 보통 사람이라면 묵묵히 농사에 몰두하는 것이 분수이고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셨던 것 같다. 분수와 겸손을 알고 자족하며 살아가는 것, 이 또한 내가 존경하는 부분 중의 하나이다.

전통적인 유교 집안으로 부엌에 쌀 떨어진 지가 언제인지도 모르고 체면만을 내세우시는 할아버지, 그 아래에서 조용히 숨죽여 지내시다가 어느 순간 집안에 면면히 흐르는 강골을 이기지 못해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생업을 위한 현실 속으로 망가지듯이 뛰어드신 분이셨다. 어머니의 표현대로라면 환경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고는 치더라도 쉽지 않은, 어떻게 보면 조금은 무디고 우직한 분이셨다고 생각된다.

집안에 피치 못한 일이 생기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아버지는 유교집안의 가장 소중한 전승문화였던 조상의 감실을 '자손이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이 모양인데 무슨 겉치레냐'라고 마당 가운데 내어 놓고 불을 살라 버렸다는 이야기는 조상공경의 유교문화를 지금까지도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는 우리 집안에서 대사건이며 어쩌면 탈출이고 반항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는 장사이든 농사이든 닥치는 대로 하시다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모든 것을 외면한 채 가능한 인연을 단절할 수 있는 농촌마을을 찾아 농사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는 사실에서 숙연하리만큼 꼿꼿한 아버지의 성품을 느낄 수가 있다.

지차이기는 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명가의 종손으로서 또 꽤 알려진 집안의 외손으로서 쉽게 외면할 수 없는, 어쩌면 좌절할 수 있기까지도 한 환경에서 묵묵히 침묵할 수 있는 인품을 지니셨던 것 같다. 우리 집안은 그동안의 전통을 생각하면 쇠락한 것도 같지만, 퇴계 선생의 양대 학맥을 이루던 개암문집을 지으신 개암선생의 후손으로 전통을 중시하며, 넓게 보면 근대까지 독립운동을 하는 등 강골에 속한다.

얼마 전에 아버지와 같은 동네에 사시든 연로하신 어르신(순흥 安씨)과 그리고 어느 때인가 어머니로 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들이 마을 뒷산을 점령하고 밤과 낮을 교대로 주민들을 괴롭힐 때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빨치산에 부역하지 않아 드디어 심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십 수 명의 빨치산들이 몽둥이를 들고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를 동네 가운데 공터에 꿇어 앉혀 놓고 둘러서서 부역을 강요하며 구령을 붙여 ‘하나’에는 몽둥이를 머리에 대고, ‘둘’에는 뗐다가 항복하지 않으면 ‘셋’에는 때려서 죽이겠다고 반복하여 협박하는 현장에서 끝까지 동조하지 않는 기개를 보이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정말 농부라기 보다가는 실사구시의 참 선비셨다. 본인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 하셨고, 명예를 중시하면서도 가족을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하셨다. 부지런하고 희생적이며, 점잖고, 부드럽고, 타인을 배려하고, 매사를 포용하시며 어쩌면 우직하고, 어쩌면 바보스럽기까지 한 나의 아버지!

아버지로 인하여 그 아래로, 그나마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있다는 데에 대하여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쓰고 싶은 것이 많다. 아쉽다면 아버지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웃 분들이 이제 거의 생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주위의 어르신들에게서, 또 어머니에게서 간헐적으로 들은 이야기들을 그냥 흘려버리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다. 남들에게 읽히기 위한 글로서 뿐만 아니라 가족사로서 기록을 만들어 보고 싶다.

 

(2011.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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