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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긴글

바우상상

by 탁구씨 2006. 8. 20.

 

바우상상

 

내 어릴 적에, 내 고향 용바우는 야트막한 야산 골짜기를 따라 논밭들이 물 흐르듯 펼쳐지는 곳으로 산 밑에 조그만 집들이 옹기종기 자리 잡은 아주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산촌이라 하기에도 단순히 시골이라 하기에도 어중간한 작은 마을로 봄에는 진달래가 온산을 물들이고 여름에는 산을 굽이돌아 논밭에 농작물들이 아기자기하게 펼쳐진다.

특산물이나 특용작물은 없고 보편적인 논농사를 주로 하는 곳으로 대부분이 자연 지형의 정리되지 않은 논밭이다.

지리상으로 보면 마을 밖 큰 도로에서는 마을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산골짜기로 사람들 역시 마을 밖의 일을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마을 사람들 끼리 가족처럼 어울려 사는 순박하고 정겨운 곳이다.

 

마을은 면 소재지에서 들어오는 우마차 정도의 길이 꼬불꼬불 산을 넘어오고 어느 지점에서부터는 도랑이 작은 내를 이루며 마을 가운데로 흘러간다.

집들은 이 도랑을 기준으로 동서 편으로 마주 보며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는데, 몇 백 미터 쯤 떨어진 곳에는 십여 가구의 작은 마을 둘이 더 있다.

이 네 곳의 마을 들을 통틀어 용바우라고 부른다.

주된 마을은 도랑의 동쪽에 그 중 집들이 많은 곳으로 양지마가 있고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이곳을 마주보며 도랑과 논 두어 배미를 건너 음지마가 있다. 음지마는 동향으로 아침에 해는 일찍 떠오르겠지만 오후에 조금 어정거리다 보면 뒤편 산그늘이 내려오므로 어둡고 겨울에는 눈도 늦게까지 녹지 않아 늘 춥게 느껴진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음지마의 좌측으로 몇 백 미터 지점에 일여덟 가구의 안마가 있다. 안마는 우리 양지마를 기준으로 대각선으로 안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반면 양지마의 좌측 몇 백 미터 지점에는 커다란 재궁이 있고 같은 성씨를 쓰는 대여섯 가구가 있는데 우리는 이를 재궁마라고 불렀다.

 

그러니 우리 마을은 마을 가운데를 기준으로 동서남북에 양지마, 음지마, 안마, 재궁마의 네 개의 조그만 마을이 오밀조밀 마주보고 있는 형태이다.

우리 마을은 시골에 흔히 있는 집성촌은 아니다. 물론 재궁마의 대여섯 가구는 종씨들이 재궁을 지키고 살고 있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각성바지 들이다.

큰 대가도 없고 들도 넓지 않아서 부유한 마을은 아니다. 그러나 넓지는 않지만 농토가 비옥하고 인심이 좋아서 그저 살기 좋은 동네였던 것 같다. 마을 사람 모두가 가족 같이 지내는 순박한 마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파수나무라고 부르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아마 마을을 지켜준다는 수호 목의 의미로 파수나무라고 자연스레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그 밑에는 꽤 넓은 바위가 있어 앉아 쉴 수가 있다. 어떻게 이런 자연스런 구성이 오랜 옛날에 이루어 졌는지 신기하거나 인위적이었다면 놀랍기도 하다. 동민들은 여름 모내기가 끝난 잠시의 휴식기에 이곳에서 호미씻이 잔치를 벌이기도 하였고 우리는 나무 밑에 꽃밭을 만들기도 하였다. 나름 어린나이에 마을 가꾸기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외부로 통하는 길은 마을 가운데를 지나 아랫마을로 연결 되는 데, 마을 끝에는 우리가 '동구'라고 고유명사처럼 부르는 동구洞口가 있다.

동구는 마을 인근에서 볼 수 없는 커다란 바위들이 모여 있고 동네에서 당나무로 부르는 커다란 나무와 여러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으며 마을을 지나 가늘게 내려오던 도랑 수준의 시내가 이곳에 이르면 조금 넓어지며 바닥이 암반을 이룬다.

아름답다고 하기까지는 몰라도 부근에서는 괜찮은 풍치가 있는 곳이다.

우리는 이곳에 물을 막아 물놀이를 하고 커다란 바위는 건너뛰기를 하거나 바위 밑에서 땅따먹기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또한 동네 어른들은 낮잠을 자거나 쉬는 곳이며 밤이면 동네 청년들의 데이트 장소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여름 한철은 동네에서 사람을 찾으려면 이곳으로 오면 거의 만날 수 있다.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장소로 우리 동네 출신이면 누구나 추억으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바로 책보자기를 팽개치거나 아니면 숙제를 한답시고 책과 노트를 챙겨 이곳으로 달려온다.

 

이곳은 어릴 때뿐만이 아니라 내 생애에서 자주 기억나는 곳이고 많은 위로와 영감을 받는 곳이다. 외지 학교엘 다닐 때에도 방학이 되면 가장 먼저 찾았고 직장 생활 중에도 휴가 때이면 늘 찾는 곳이 된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장래에 대한 신나는 꿈을 꾸었다. 나무 그늘에서 책을 보고, 바위 위에 누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거나 둥둥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고는 했는데, 과학자가 되어보기도 하고 대통령이 되어보기도 하고 기자가 되어 보기도 하였으며 예쁜 소녀를 만나기도 했다. 곧잘 책 속의 주인공이 되는 곳이다.

또한 우수한 학교에 진학을 다짐하기도 하고 장래에 대한 많은 계획들을 기원하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힘들 때나 다짐을 할 일이 있을 때에는 기회가 되면 이곳을 찾는다. 여기서 나는 많은 위안을 받았다.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곳, 비록 상상과 꿈으로 끝났을 지라도 이 장소는 나에게 정말 행복한 곳이었다. 그리고 늘 생각나는 곳이었다.

내 고향 마을이 용바우인 것은 이곳에서 유래 되었다고 하고, 고향 용바우는 내 인생에서 정신적 지주이고 마음의 바탕이다.

용바우는 나의 가장 편안한 마을이고 생각 만으로라도 나에게 위로와 꿈과 영감을 준다.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나는 블로그나 카페 등 많은 곳에서 아이디나 닉네임을 바우김, 바우세상, 바우상상이라고 쓰고 있다.

바우상상이라고 썼을 때 나는 즐겁고 행복한 , 팔딱팔딱 뛰는 생동감 있는 상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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