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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 정승 '고불 맹사성' 고택을 찾아가다 /고택답사

by 탁구씨 2019. 7. 3.

이번 답사여행은 충남 아산(온양)의 '맹씨행단'과 그 부근의 고택들이다.

온양도 이제는 수도권이다. 수도권 전철이 들어가고 도로망도 매우 잘 되어 있다.

내가 맹씨행단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오래 되었다.

오래 전에 온양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맹씨행단에서 고불 맹사성 대감의 행적과 그 고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은퇴를 하게 되면 그런 형태의 한옥에 그런 방식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 나는 그 고택에서 받은 느낌으로 내가 건축 하고 싶은 한옥을 스케치 해 본 적도 있다.

사실 맹씨행단은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져 온 대가(大家)의 종택이나 고택과 같은 규모를 생각하면 실망이 크다.

한 나라의 정승의 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간결하고 소박하다.

그러나 작고 아담하다 하더라도 그 주인들의 품격 때문인지 화려하고 거창한 다른 고택들 못지않게 풍겨지는 느낌은 강건하다.



고택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工" 자형 집으로 중앙에 대청을 사이에 두고 왼쪽과 오른쪽에 온돌방을 둔 홑 처마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민가(古民家) 형태로 내가 자란 경북 북부지역의 일반 민가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대청을 사이에 둔 어느 한 쪽에 부억과 고방이 있는데 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별도의 건물이 있었으리는 짐작을 하게 된다.

일부가 복원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둘러쳐진 담장이나 대지의 크기와 비스듬한 지형으로 보아 그리 웅장한 규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맹사성 고택은 설화산을 서쪽으로 등지고 동북으로 배방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앞이 강하고 뒤가 약한 느낌이 들기도 하나 고택의 뒷 담장을 이중으로 두르고 있으며 남서쪽에 송림이 울창하여 허한 부분을 보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고택은 고려시대에 지어진 집으로 원래 최영 장군이 살았으며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녀 사위이다. 



고택 뒷편에는 고려말 이군불사(二軍不事)의 고결한 절개를 지키다 순절한 두문동 72현인 맹유와 맹희도, 맹사성의 위패를 모신 사우(祠宇) '세덕사'가 있다.



마당 좌측에 있는 유명한 은행나무 두 그루는 세종대왕때 좌의정이며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이 1380년경에 심은 것으로 주위에 단을 쌓고 강학을 하던 곳이라 하여 행단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오늘 날 고택과 함께 '맹씨행단'이라 불리게 된다.

이 은행나무는 청백리 맹대감의 삶을 함께 살고 그 후 600년이 넘는 세월을 건장하게 지내오면서 그 후세의 이야기들을 보고 들었으리라 생각하니 경외심과 함께 인생의 유한함도 함께 느끼게 된다. 



고택에서 남측으로 쪽문을 나서면 밭이 있고 송림이 있으며 그 가운데에 정자 '구괴정'이 있다.

구괴정(三相堂)에는 세종대왕때의 정승 황희, 맹사성, 권진이 각기 세 그루씩 심었다고 전하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지금은 아홉 그루 중 두 그루만이 오랜 세월을 견뎌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다. (사진 좌측의 속빈 밑둥이 그중 하나이다) 



여기까지는 고택에 대한 이야기이나 내가 맹씨행단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것은 좌의정 맹대감의 인품에 대한 것이 더 크다.

맹사성은 매우 청빈하여 낙향 후 손수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 쪽문 밖 구괴정 부근에 있는 밭이 그 농토가 아닌가 하며 내가 답사한 그 날에도 그 밭에는 초여름 햋빛이 강하게 내려 쪼이고 있었다.

당시 아산에 신임 관료가 인사차 왔다가 옛 정승이 농사를 짓고 있으니 할 수 없이 관복을 벗어 부치고 함께 밭을 갈았고, 손님으로서의 식사를 기대했으나 꽁보리밥에 나물 반찬을 내 놓으며 '백성들은 이도 없어 못먹는다' 라고 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런데 무엇보다가도 나의 관심을 끄느 것은 역시  '강호사시가'이다.

은퇴 후 초심으로 돌아가 모든 명예와 욕심을 버리고 초연히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다.

 

        '강호에 봄이드니 미친 흥이 절로난다

         탁료궤변에 금린어 l 안주로다.

         .............

         ...............

         강호(江湖)에 겨월이 드니 눈 기픠 자히 남다

         삿갓 빗기 쓰고 누역으로 오슬 삼아

         이몸이 칩지 아니 하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이는 춘하추동을 노래한 연시로 

'주위에 봄이 찾아오니 깊은 흥이 절로 일어난다.

막걸리를 마시며 노는 시냇가에 싱싱한 물고기가 안주로다

..................

..................

주위에 겨울이 찾아오니 쌓인 눈의 깊이가 한자가 넘는다.

삿갓을 비스듬히 쓰고 도롱이를 둘러 것옷을 삼으니

이 몸이 이렇듯 춥지않게 지내는 것도 임금님의 은덕이시도다'


그의 인품이 절로 느껴진다.

소박한 삶과 임금에 대한 충성, 그리고 강직하면서도 자연을 벗삼으며 여유자적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정말 내가 매료되는 순간이다.



맹사성에 대하여는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열아홉에 장원급제를 하여 스므 살에 파주 군수가 된 맹사성이 자만에 차있던 시절이다.

목민을 위하여 주변의 한 스님을 찾아가 물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깊이 생각하여야 할 덕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나쁜 일을 하지말며 착한 일을 많이 하여야 합니다."

좋은 덕목을 기대했다가 너무나 평이한 이야기에 마음이 상한 맹사성이 거만하게 일어서려고 하자 스님이 차라도 한잔하고 가라고 붙잡는다.

맹사성이 예의상 자리에 앉자 차를 따르는 그 스님이 찾잔에 물을 따루는데 찻물이 넘치는 데에도 계속 따르는 것이 아닌가!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망칩니다." 하고 맹사성이 일러 주는데에도 스님은 계속해서 따룬다.

맹사성은 잔뜩 화가 났고,

이에 스님은 한참 후에서야 맹사성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망치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이에 맹사성은 스님의 말에 크게 부끄러움을 느껴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머리가 문턱에 세계 부딪히고 말았다.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

겸손을 이야기하는 이 일화는 어쩌면 맹사성이 청백리로 큰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다음은 내가 어릴적 읽은 동화 같은 이야기이다.

맹사성은 소를 타고 다니는 정승으로도 유명하다.

그날도 맹사성이 소를 타고 고향으로 향했다.

그런데 맹사성이 가는 길목에 있는 한 고을의 원이 맹사성에게 잘 보이려고 아랫사람을 시켜 맹사성 대감의 일행이 지나갈 길을 잘 다듬고 깨끗이 쓸어 놓고 기다렸다.
그때에 한 허름한 노인이 소 등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저벅저벅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에 화가 난 원이 "아니, 맹고불 대감께서 지나가라고 길을 닦아두었는데 웬 거지 노인이 먼저 지나  가느냐 ?"
그러자 저만치 가던 맹사성이 중얼거렸다.
"내가 바로 그 고불일세."
뒤늦게 그 노인이 맹사성이었음을 알게 된 원은 땅을 치며 무안해하였다.

맹사성이 강직하면서도 청백리이며 여유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인 것 같다. 

(2019.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