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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짧은글

남한산성

by 탁구씨 2023. 2. 7.
남한산성

남한산성


무너진 동장대를 지나 암문을 통과한다
벌봉에 걸터앉아
수 마장 건너 수어장대를 바라본다
눈발이 성성하고 산성이 흔들린다
성 밖 함성에 바위가 구른다
성곽이 좌로 우로 구불구불 갈팡질팡하고
외세는 산성을 포위하고
화포는 수어장대를 겨누고 있다
군주는 행궁에서 수전을 떨고
미약한 중신은 마당에서 손발을 오그리고
백성은 어두운 골방에서 사시나무를 떤다
할 수 있는 일도 걸어볼 희망도 없다

급조된 농민군은 뾰족한 작대기에 의지한 체
성곽 밑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떤다
얼음이 된 주먹밥은 씹히지도 않는다
눈을 삼켜 생명을 부지한다
덮어쓴 거적 사이로 칼바람이 스친다
감각도 얼고 생각도 얼어버린 지 오래다
두고 온 가족과 동료를 생각함도 호사이다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 처한 상황조차도 잊어버렸다
구름은 무심히 흐르고 까마귀만이 까악 까악 운다
무지렁이 백성에게 작대기 하나 쥐어준들 그들이 무엇을 하랴
무너진 산성의 개구멍을 통하여 달아나고
다시 붙잡혀 오고
잡으러 가는 자나 잡아 오라는 자나
달아나고 싶기는 마찬가지다

성안은 앙상한 바람이 일고 냉랭하고 적막하다
구름이 산 아래로 내리 달린다 수어장대는 무엇을 하는가
왜 하늘 높이 처마를 들고 위용만을 세우고 있는가
행궁에서는 무엇을 하는가
군주는 무엇을 하였는가
울창한 노송이 하릴없이 칼바람 소리만 청청하다
산성을 타고앉은 바위는 처절한 상황을 무심히 보고만 있다
남한산성은 울어야 한다 목 놓아 통곡하여야 한다
외침을 막으려 쌓은 성곽이 군주와 신하와 백성을 가두었다
외세의 침공에 쫓겨 종묘와 사직을 버리고 고뇌의 시간을 보내는
군주의 옹색한 피난지 남한산성
조선 16대 군주는 결국 성문을 열고 나와
삼전도 얼음판에서 오랑캐를 향해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리고 이마에 피가 맺히는 치욕을 겪는다
(병자호란, 인조, 청 태종, 삼궤구고두례)

암문을 통과하여 봉암성으로 들어간다
무너진 산성으로 산짐승이 드나든다
허물어지고 무너지는 것도 세월과 역사의 한 단편일 진데
무너진 것은 무너진 대로 두라
바라보며 역사를 더듬어보게 하라
끊어질 듯 이어지며 흘러내리는 산성의 성곽이 든든하다기보다
처연하고 쓸쓸하다
자랑스럽지만은 않은 역사의 현장에서
또 다른 화포의 탄두 앞에 우왕좌왕하는 작금의 상황을 본다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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