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농부, 올해 풍작이네!

올해 우리 농장은 풍년이다. 방울토마토는 줄기가 휠 정도로 달렸고 고추도 많이 열렸다. 토마토줄기와 고추줄기가 얼마나 실한지 높이가 1.5미터는 된다. 얼마나 탐스럽고 풍성한지 이웃집에서도 난리이다. 풍성한 것 보다가도 알알이 빨갛게 익어가는 방울토마토가, 그리고 풋풋하게 굵어지는 고추가 너무 예쁘고 정겹다는 것이다.
사실 이 농장은 우리 집 아파트 복도 끝의 작은 공간이다. 지난봄에 우연히 화원 앞을 지나다가 여러 종류의 모종을 팔고 있기에 재미로 토마토 열두 포기와 고추 열두 포기를 사 가지고 왔다. 그리고 버려져 있는 화분 여덟 개를 찾아 나누어 심어 이곳에 내어 놓았다.
오래 전에 단독 주택 옥상에서 커다란 화분과 스티로폼 박스에 상추와 쑥갓, 고추, 토마토를 키우시던 장모님이 생각나서 한번 해보기로 한 것이다. 장모님은 수시로 물을 주시고 늘 그 주위에 계셨다.
이번에 내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모종을 사 온 바로 그날 밤에 빈 화분을 구하고 부산히 옮겨 심은 다음, 이튿날 아침에 제대로 심었을까? 하고 바로 모종부터 살펴보았다. 그런데 잎이 시들어 있다. 출근하였다가 퇴근 후에 보니 더 시들어 있었다. 잘 안 되는 것인가? 아직은 기대를 가지고 옷도 갈아입기 전에 부랴부랴 물을 조금 더 주고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 보니, 아! 이것이 살아났다. 파릇한 색깔을 띠며 꼿꼿이 자리를 잡고 일어서고 있었다.
그 후에는 그것이 일상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고, 저녁에 퇴근하면서 보고, 그때마다 크기와 상태가 달라졌다. 파릇파릇하던 잎에서 어느덧 줄기가 생기고 제법 작물로서 모양을 잡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농부의 마음일까? 어릴 적, 시골에 살 때 농사를 지으시던 아버지께서 ‘농작물은 농사꾼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 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그만큼 자주 관심을 가져주고 열심히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말씀이셨다.
매일처럼 자라는 작물이 신기했고 그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지나가던 이웃들에게서도 ‘보기가 좋다고 농사를 지어도 되겠다.’ 고 하실 때에는 정말 농사꾼이라도 된 듯이 흐뭇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점차 날씨가 더워지면서 아침에 물을 주고 나갔지만 저녁에 들어오다가 보면 잎이 시들고는 하는 것이다. 사람이 다니는 통로이니 어떻게 햇볕을 가려 줄 수도 없다. 거기에다가 어느 날부터는 잎이 노랗게 떡잎이 지는 것도 있었다. 할 수 없이 화원을 하는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친구 말은 너무 부지런해서 그렇단다. 과잉관리라는 것이다. 물을 너무 자주 주어서 떡잎이 지는 것이고, 이 여름에 잎이 시들 수도 있으나 화분이 너무 작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농작물은 대지의 기운을 받고 자랄 텐데 보기만 좋으라고 예쁜 화분만 골라 심고 콘크리트 바닥에 두었으니 그게 제대로 될 리가 있겠는가?
다시 화분을 큰 것으로 구하여 옮겨 심었다. 그러나 결국 토마토 화분 하나와 고추 화분 한개는 살리지 못했다. 그리고 몇 주 후에 보니 드디어 꽃이 피기 시작했다. 하나 둘 보이더니 어느 순간에 제법 많이 피었다. 또 의문이 생겼다. 농작물은 수정이 되어야 될 터인데 벌, 나비는커녕 곤충이라고는 볼 수가 없는 고층 아파트에서 어떻게 열매가 열릴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아직도 확실히는 모르겠다. 어떻든 저렇게 풍성하게 열매가 열렸으니까.
그런데 다른 문제가 생겼다. 고추 꽃이 핀 바로 밑에 새까만 벌레가 끼는 것이다. 나는 면봉으로 닦아 주기로 했다. 그런데 그것이 점점 펴져 잎으로 옮겨 갔다. 그것도 일일이 닦아주는데 작물을 가꾼다는 재미도 있었지만 일거리이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어느 날 아내가 새벽같이 뛰어 들어왔다. 열매가 달렸다는 것이다. 이 농장에 대한 관심은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 전체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정말 신통하게도 열매가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개씩 늘어나더니 어느 순간에 스무 개, 서른 개, 백 개도 훨씬 넘어섰다. 매일 아침에 숫자를 확인하는 순간은 밤새 배송되어온 선물을 확인하는 기분이다. 작물들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비스듬히 넘어졌다. 부랴부랴 동네 공사장에 가서 굵은 철사를 구해 지주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열매들이 빨갛게 익어가기 시작한다. 우리가 사는 도심의 고층 아파트에서 토마토와 고추 농장이 생긴 것이다. 열매가 달리고 익어가는 것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가족 모두에게 신기한 곳이 되었다. 그저께는 드디어 풋고추 두 개를 따서 된장에 찍어 먹었다. 이른 아침의 현관 앞 복도는 우리 집 텃밭이 되었다.
이웃집에서는 ‘금년도 김치는 우리 농장에서 나는 고추로 담글 테니 미리 주문을 한다.’ 는 농담을 한다. 내가 시골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식물을 키우는 것이 무척 재미있다. 어떤 때는 화분들이 베란다를 가득 메우고 아름다운 꽃들이 연속하여 핀 적도 있다. 아내는 그중 예쁜 것을 골라 거실 장위에 올려 두기도 하고, 예쁘게 잘라 화병에 꽂아 식탁에 올려놓기도 한다. 그러면 집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어느 날 고민이 생겼다. 아파트 게시판에 ‘아파트 공용공간에는 화분이나 자전거 등을 두시면 안 됩니다….’라는 공지가 붙어 있었다. 나의 경우도 해당이 될까? 사실 지장을 줄 수 있는 공간은 아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
우리 집 화분은 지금 절정이다. 한창 열매를 맺어 익어가고 있고 장소를 이동하기에는 너무 크고 많다. 처음부터 실내 베란다에서 심었어야 하는데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둔다는 생각만을 한 것은 잘못이었다.
고민 끝에 메모를 써서 양해를 구하기로 했다. ‘이렇게 무성하게 자랄 줄은 모르고 심었는데 불편을 드리지는 않는지요? 지금 한창 열매를 맺고 있어 조금만 더 두었다가 바로 추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메모 넉 장을 써 작물들 줄기에 붙였더니, 며칠 후 이런 메모가 붙어 있었다. ‘괜찮습니다. 철수하지 마세요. 우리도 즐겨 보고 있습니다.’ 우리 집뿐만이 아니라 이웃에게도 관심사였구나! 비록 소소한 일이고, 베란다 농부였지만 매우 즐겁고 재미있는 체험이다. (2019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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