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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짧은글

절 집에 묵다

by 탁구씨 2021. 9. 20.

 

 

절 집에 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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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 그 어떤 구속도 없는 나만의 공간에서 조용한 시간을 가져보고 싶었지 이왕이면 자연 가까이에 애써 꾸미지 않은 깨끗한 곳에서 특별히 할 일도 신경 쓸 일도 주위를 의식할 필요도 없는 조금은 게으른 그런 시간 말이지 숲길을 걷거나 먼 산을 멀거니 바라보거나 그냥 누워 뒹굴거나 어쩌면 이런저런 생각조차 없는 그런 시공간을 원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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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사찰의 일주문을 들어서니 울창한 노송이 반겨 주었어 옆으로 시릴 듯 투명한 계곡물이 동행하고 무성한 숲이 두 팔을 들어 환영하며 산새들이 숲 소식을 전해주었어 아주 경쾌했지 혼자 걷는 길이 결코 외롭지 않았어 그래 어떠한 경우라도 세상에 완전한 외톨이는 없어 그냥 모든 일상에서의 일탈이고 해방이었지

3

고독은 결코 외로움이 아니며 최대의 도전이라는 거지 이제 나는 구도의 길을 가는 수도승이 되었어 소나기가 한차례 지나갔지 그동안의 세속의 묵은 때를 씻고 가라는 것 같았지 피어오르는 운무가 깊은 산 계곡을 감아 올라 운치가 대단하더군 갑자기 숙연해지고 마음이 맑아지며 가벼워지는 체험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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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그러나 정숙하게 좌정을 하고 앉아 먼 산을 멍하게 바라보았지 정말이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더군 그냥 내가 누구인지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어 정갈하게 비질된 마당을 걸었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상념을 모두 내려놓고 마당을 돌았어 순간 사각사각 마른풀 소리를 들었어 이 소리가 끊어질까 염려되었지

5

별들이 총총하여 모든 것이 잠든 듯하면서도 모든 것이 깨어 있어 고요가 깊어지고 별들도 하나 둘 잠에 들었지 새벽 어슴푸레 목어木魚 소리를 들으며 도량석에 참석했어 경문經文은 모르더라도 참회문에 따라 백팔 배를 올렸지 참회할 것도 많고 감사할 것도 많으며 기원할 것도 많더군 팔다리에 통증이 느껴지고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 그것은 가슴의 아픔과 눈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2019.08.24 모바일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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