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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olic & Family

오월연(五月硯)과 우리 어머니

by 탁구씨 2016. 5. 3.

오월연과 우리 어머니

 

우리 집에는 벼루 오월연(五月硯)이 있다. 둥근 모양의 벼루 세 곳에 먹을 같은 방향으로 반복해 갈아 세 개의 움푹 파인 홈이 있는 벼루이다. 둥근 달이 높이 뜬 밤에 달빛을 벗 삼아 글씨를 쓰려면 하늘에 달하나, 둥근 벼루에 달하나, 움푹 파인 세 개의 홈에 비친 달이 세 개, 다섯 개의 달이 보인다.

오월연은 어머니께서 시집오실 때 쇠락한 선비의 집안인 외갓집에서 오로지 가문 하나만 보고 어린 딸을 시집보내면서 혼수 틈에 끼워주신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그 벼루를 써 보신 적은 없으실 것이다. 외갓집이나 우리 집이나 쇠락한 선비의 집으로 공부를 하고 벼루에 먹을 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을 것이다. 외갓집에서 어린 딸을 시집보내면서 무어라도 주시겠다는 생각으로 넣어주신 것이 아닐까.

어머니는 양반 가문만을 따지던 외할아버지에 의해 우리 집안으로 시집을 오셨다. 어머니는 어른들의 말만 듣고 양반이라는 가문 하나만을 보고 중매가 되어 시집을 오셨는데 우리 집에는 당장 먹을 쌀이 없는 역시 쇠락한 선비의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는 집안 살림에는 관심도 능력도 없으셨을 테고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할아버지는 전형적인 선비(士)의 마지막 세대이었던 것 같다. 한 동네에 사셨다는 안씨(順興 安氏) 어르신에 의하면, 어느 여름 날 갑작스런 소나기로 마당에 말리려 펼쳐 놓은 고추가 떠내려 갈 때 할아버지께서는 큰 마루에 서서 동네를 바라보며 '거기 누가 없느냐, 우리 마당에 고추가 떠내려가니 와서 걷어라.' 라고 소리만 치신 분이라고 한다. 양반은 험한 일을 하지 않으신다는 이야기이다.

이미 반상의 세상은 바뀌고 있었고 당연히 가세는 기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역시 기울대로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켜 세우고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생계를 위해서는 농사에 몰두 하여야 했으나 몰두 할 수 있는 전답이 없었고 뿐만 아니라 마음을 둘 만한 것 들을 찾을 수 없으니 집을 떠나 잠시 방황도 하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이러한 상황을 속으로 삭이며 아버지 뒤를 묵묵히 보아 주실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어머니 역시 양반의 자손이지만 당장에 먹을 것이 없으니 온갖 어려운 일, 험한 일은 어머니의 차지였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려울 때는 쌀은커녕 밥솥도 없어서 질그릇에 밥을 안쳤다고도 한다. 그 신분상의 자존심을 겸한 고통이 얼마나 컷을 런지 짐작이 된다.

다행히 아버지는 책임감이 강한 분이셨고 천성이 부지런하고 솜씨가 좋은 분이라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일을 하셨다. 잠은 거의 주무시지 않고 낮에는 농사일에, 밤에는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짜고 새벽에 일어나 소를 길렀으며 송아지가 생기면 이웃에 농우를 주셨다. 내 기억에는 아버지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시는 듯하고, 어쩌면 아무생각도 없으신 듯한, 정말 일밖에 모르는 것 같은 우직한 분이셨다. 어머니 역시 모든 일을 함께 하셨을 것이다.

농토가 늘어났다. 내가 태어나고 자랄 무렵에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많은 농토를 가지고 계셨고 한 때에는 정미소 운영에도 손을 대셨다. 덕분에 나는 모든 것이 부족한 시기이지만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주로 농사만을 지었기에 돈은 부족하였다. 어머니는 우리 학비와 생필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농산물을 머리에 이고 오일 장날 장터에 갔다 파셔야 했다. 장날 전일에는 콩을 비롯한 각종 농산물과 집에서 기른 닭, 달걀, 심지어 미나리까지 정성껏 다듬으셔서 장볼 준비를 하시던 기억이 있다.

장날에는 가끔 국수를 사주시고는 했는데 어머니는 어렵게 해보는 호사였던 것 같다. 나는 막내로 철없이 이것저것 졸라 되었던 기억도 있다.

어머니는 마음이 넉넉한 분이셨다. 그래서 수시로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모였고 그때마다 음식을 푸짐히 내어 놓고는 하셨으며, 우리 집 큰일은 동네 잔치였고, 동네에 큰일이 있는 날에는 우리 집이 들썩 거렸다. 어머니는 또한 지나가던 어려운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냥 보내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무엇이라도 조금 도와주고는 하셨다. 오늘의 우리가 이렇게 어려움 없이 살고 있는 것은 그런 어머니 영향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201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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