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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긴글

생명이 있는 그림(검단산 2004.6.6일)

by 탁구씨 2005. 5. 25.

6월 6일 현충일, 오늘은 검단산 충혼탑 너머 산곡동길을 올랐다.

산곡동은 내가 좋아하는 마을이며 지명이다. ‘산곡’이라는 말이 왠지 넉넉하지는 않아도 조용한 산속에 적당한 넓이로 터전을 잡은 기품 있는 옛 선비 마을 같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래서 길옆의 식당 산곡별장은 오래전부터 다니던 집이고 산곡초등학교는 나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산곡서당이라고 부르고는 한다.

 

옛날에 기품 있는 한 선비가 살았다. 학문도 높고 아쉬움이 없는 물심이 풍부한 선비이다. 그는 학문과 서화를 좋아하여 항상 그의 사랑에는 비슷한 사람들로 붐볐다. 그런데 그에게는 금박을 입힌 아주 좋은 빈 병풍 한 폭이 있어서 늘 합당한 그림을 그릴 최고의 화가를 찾고 있었는데 마땅치 못하여 아쉬움이 많았다. 그는 그 병풍에 생동감 있는 살아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원이었고 그런 그림을 그려주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다 해 줄 생각이었다. 간혹 스스로 최고라는 선비나 화가들이 찾아오고는 했으나 늘 실망만을 안겨 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허름하기는 하지만 자칭 최고라는 화가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100일 동안 조용한 별채를 마련해주고 원하는 음식과 좋은 술을 주며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으면 최고의 그림을 그려주겠다’라고 큰 소리를 쳤다. 선비는 늘 있는 일이기는 하나 범상치 않다는 느낌도 들어 그렇게 하기로 하고 빈 병풍을 내어준 후 하인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모실 것을 일러두었다.

 

그리고 날짜가 흘러갔다. 어느 날 진행이 궁금하여 심부름하는 사람에게 그가 그림을 잘 그리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매일 좋은 음식과 술만 마시며 그 외에는 잠만 잔다는 것이다.

순간 당황했으나 인품 있는 선비인 그는 약속일까지 참아보기로 했다. 틈틈이 동정을 물어보았으나 변화는 없었다. 초조히 날짜는 흘러갔다. 드디어 98일, 99일, 100일이 되었다.

 

아침 일찍 선비는 별채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있어야 할 화가가 없었다. 화가만 없는 것이 아니라 짐까지 몽땅 가지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순간 아차! 속았다는 생각이 들고 그는 부랴부랴 무엇보다도 아끼던 병풍부터 찾아 펼쳤다.

아! 거기에는 예상대로 그림은 없고 그냥 먹으로 굵고 길게 한 줄을 친 낙서만이 남아 있었다. 도망가려면 그 아까운 병풍에 낙서나 하지 말지 그는 후회막급이었다.

날이 저물었다. 여름밤이었다. 사랑문을 열고 대청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니 무심한 은하수만이 길게 띠를 그리고 있었다. 그는 심란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그 아까운 병풍을 다시 한번 펼쳐보았다. 아까움과 허탈감이 밀려왔다.

그러고 있기를 한참, 사위는 고요한데 어디선가 잔잔한 물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큰 강의 물결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뱃사공의 노랫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듯도 했다. 갑자기 무슨 환청인가 하여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다른 변화는 없었다. 보이는 것은 괜히 심란하다고 느껴지는 병풍밖에 없다.

 

그는 병풍을 접었다. 그런데 물소리가 뚝 그치는 것이 아닌가! 다시 펼치니 물소리가 들리고......

아차! 그는 무릎을 탁 쳤다. 그는 감격하여 엎드려 하늘에 절을 올렸다. 병풍에 그어진 낙서 같은 한줄기 먹 줄, 그것은 황하강의 물줄기였던 것이다. 그의 높은 학문과 인격, 적선, 그리고 순수한 염원이 살아있는 그림으로 보답되어 온 것이다.

 

이는 나의 아버지께서 산촌의 깊은 밤에 들려준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나의 아버지는 엄격한 촌부이셨다. 여기서 ‘엄격한’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촌부이기는 하지만 근면과 사유, 특히 자존심과 삶의 기준이 확실한 분이셨다.

현실이 팍팍하기도 하셨겠지만 선비 집안으로 전통은 지키되 정도 이상의 허례허식은 타파하고 자존감이 꺾이느니 차라리 산촌으로 숨어 사는 길을 택하셨다는 것을 그간의 삶의 면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인민군에 대항하던 일’등은 그 동네의 연세 드신 분이 전해주던 신화 같은 이야기들이다.

현충일, 선비정신이 감도는 하남 충혼탑 너머의 산곡동을 오르면서 나는 문득 나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버지는 참 선비셨고, 우리 가문은 직계는 아니지만 넓게 종친 전체로는 건국공로훈장만으로도 2-30장을 받은 대한민국 최대의 가문이다.

(2004. 6.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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