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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행

한옥 탐방, 여주 김영구 가옥을 찾아서

by 탁구씨 2012. 3. 20.

한옥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비록 나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정서적 바탕 같은 것이 아닐까?

서울의 북촌을 비롯하여 안동, 영주, 봉화, 청송 등 경북 북부지역과, 경주, 전주, 남해 일원 등의 한옥 마을을 많이 다녔다.

단순히 보고 느끼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건축물 그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역설적이게도 과학적이고도 실용적인 구조, 주변 지형과의 조화, 지극히 자연과 더불어 사는 공간 배치, 그리고 향수 같은 친근감이다.

언제나 그 가운데에 들어서면 시대와 공간을 뛰어 넘어 일체가 되는 것을 느낀다.

다녀와서 되돌아 보는 그 편안한 회상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이외로 서울을 벗어나면 근교에서는 그 친근한 고택의 한옥을 발견하기가 쉽지않다.

가까이 양평 여주 경계 부근에 그러한 한옥이 있다는 이야기를 오래 전 부터 듣고 가 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기회가 생겼다.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190번지대, 중요민속자료 제126호, 1753년(약260년전)에 창녕조씨 가문의 조명준이 건축하였다고 한다.

조명준의 문중은 수많은 인물을 배출해낸 조선후기의 명문으로 그의 아들 이조판서 조윤대를 비롯해 이조판서 조봉진, 문정공 조석우, 독립운동가 조성환 등의 후손들이 이 집에 대대로 거주하였다.

그후 독립운동가 조성환의 부친 조병희가 독립군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마을 주민에게 매각하게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큰사랑채는 전면 툇마루가 있는 사랑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아래 위 두칸의 큰방과 아궁이간, 우측에 작은방과 대문간이 있으며, 전면 툇마루 남쪽에는 전면으로 돌출한 누마루가 있다.

이 누마루는 조선 반가의 특징이지만 큰 사랑채 앞에 높이 돌출하여 위엄을 나타내고 선비의 여유로운 모습을 상상할 수가 있다.

여름날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멀리 한강을 굽어 보며 차를 마시거나 멀리서 찾아온 벗을 대접하였을 그 운치가 전해 온다.

안채는 'ㄷ'자형이며 경북 북부지역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작은 정원에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아담하며, 안마당에는 다른 민가에서는 본 적이 없는 해시계가 있는데 경기 민속자료 2호이다.

(현재는 안내판 만이 있고 실재는 사랑채 앞으로 이동해 있다. 처음 위치가 궁굼하다.)

가옥은 전체적으로는 'ㅁ'자형이며 'ㄷ'자형 안채와  'ㅡ'자형 큰 사랑채, 'ㅡ'자형 작은사랑채, 헛간채로 구성되어 있고 야트막한 야산을 배경으로 남동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큰 사랑채에 조금 물러나 살짝 어긋나게 나란히 작은 사랑채가 있는것도 이집의 특징인것 같다.

현재 주인이 거주하고 있어 요즘 문화재들이 덩그러니 건물만 남아 있는것 보다가는 사람사는 냄새가 난다.

 

사랑채와 안채 툇마루에는 분합문이 운치있게 달려있는데 그 창살이 매우 아름답다.

아마 이 집은 앞 텃밭 부근에 대문과 행랑채가 따로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현재는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아름다운 형태를 띄고 있다.

또한 뒷산의 지형 또한 우람하지않고 야트막한 언덕이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흘러 주택이 자리하고 멀리 한강이 살짝 보인다.

특이한 점은 이제까지 다녀 본 반촌은 보통 구옥들이 커다란 마을을 형성하거나 흔적들이 있는데 이 마을은 주변에 다른 반가 한옥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단순한 방문자로서 아쉬움이 한가지 있다면, 이 집이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김영구 가옥'으로 알려지고 안내문 또한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적이 소유보다가는 역사적 사실이나 문물로서의 문화재적 가치가 중요할진데 '여주 조씨문중 가옥'이나 '독립운동가 조성환 가옥'이라고 해야 되고 소유도 원래 문중으로 환원되거나 국가로 이전될 수 있으면 어떨까? 

(2012. 03.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