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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탁기의 블로그(2006년부터) - 길을 걷다
시 & 짧은 글(2023 ~ )

사람이 가는 길 / 김탁기

by 탁구+ 2026. 1. 22.

 

사람이 가는 길 / 김탁기

 

사람이 가는 길이 있다. 인간이라는 말이 아직 부끄럽지 않다고 느낄 수 있는 길. 끝까지 걸어도 스스로를 외면하지 않아도 되는 길이다. 제목만 적어 둔 채 몇 해가 지났지만 그 길은 여전히 한 문장으로 붙잡히지 않는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다운 사람은 어떤 모습인가. 무엇이 우리를 사람으로 서 있게 하는가. 그 질문들은 문장을 쓰려는 순간마다 다시 길이 된다.

 

그 길 위에는 품위와 진실, 정의와 책임이 흩어져 있다. 붙잡으면 규범이 되고 놓치면 공허해지는 말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하나씩 세어 본다고 해서 사람의 길이 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들을 몸에 묻힌 채 조용히 걷고 그 발자국이 쌓여 사람이 가는 길이 된다.

 

그 길은 짐승이 다니는 길이나 아무렇게나 패인 비탈과는 다르다. 높이 있으나 떠 있지 않고 숭고하되 인간의 발로 가는 길이다. 누구도 대신 걸어 줄 수 없고 누구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길. 이미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그려진 길이지만 어디까지가 정해진 선이고 어디부터가 선택인지는 직접 걸어보아야 알 수 있다.

 

늘 길을 찾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그 길 위에 서 있다. 그 흐름을 바꿀 수는 없고 단지 그 안에서 고개를 돌리고 발을 옮길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은 그 틈에서 스스로의 걸음을 묻는다. 뒤를 돌아보면 지나온 자리가 있고 앞을 보면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일들이 있다. 사람의 길은 언제나 과정이며 멈추는 순간에도 진행 중이다.

 

길은 수평으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솟구치고 멈춰 서서 판단을 요구하기도 한다. 어떤 길은 바다를 붉게 태우며 뻗고 어떤 길은 하늘을 향해 가느다란 선을 그으며 오른다. 빛이 모이는 쪽으로 점점 좁아지기도 한다. 이곳과 저곳을 잇는 투명한 빛이 스며 있는 통로처럼 길은 이어진다.

 

사람의 길은 곧지 않다. 구불구불 휘고 꽃이 피었다가 사라지며 산새가 울다가 잠잠해지기도 한다. 비바람과 눈보라가 지워 버리는 날도 있다. 그러나 길은 끊어지지 않는다. 산과 강이 막아서면 돌아서 간다. 그 모든 굴곡과 풍경을 품은 채 길은 계속된다. 언덕을 넘고 지평선을 넘어 바다를 가르며 저 밝은 쪽으로 향한다.

 

사람은 어느 순간에도 이미 길 위에 서 있다. 삶이 그런 길이다. 자존과 정의, 평화와 사랑을 손에 쥐고 끝내 내려놓지 않으려 애쓰며 사람은 길을 간다. 그 길을 지금 내가 걷고 있다. 등 뒤에서 내가 나를 바라본다. 지금도 바로 걷고 있는지 사람의 방향을 잃지 않았는지. 나는 사람이 가는 길을 가고자 한다. 다른 무엇이 되기보다 끝내 사람으로 남기 위해서.

(퇴고推敲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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