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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탁기의 블로그(2006년부터) - 길을 걷다
시 & 짧은 글(2023 ~ )

익숙하지만 생소한 순간

by 탁구+ 2025. 10. 31.

 
익숙하지만 생소한 순간 
 
꽤 오랜 시간 가을 여행을 하며 지냈다.
고향으로의 여행
유적지로의 여행
관광지로의 여행
일상으로부터의 여행이었다.
수 십 년 매인 일과에서의 탈출이었고
최근 원하지 않게 주어진
시간, 수많은 고요와 적막에서의 탈출이었다.
고향을 찾아 지인들을 만나고
낯익은 골목을 지나 들길을 걸었다.
가벼운 산을 오르기도 했다.
때로는 유적지를 답사하고
때로는 관광지에서
유쾌하게 떠드는 사람들 속으로 묻혔다.
그 익숙하지만 생소한 순간들
순간순간을 애써 글로 쓰거나
흔적을 남기려 하지는 않았다.
꼭이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은
사진에 담았다.
그것이 순간의 감상을
더 진실되고 현실감 있게 그리고 쉽게 기록할 수 있었다.
더러는 놓쳤지만 아쉽지 않았다.
어차피 놓치기 위해 떠나온 길이 아닌가.
하늘은 높았고
들은 넓으며
구름은 두둥실 떠갔고
꽃은 아름다웠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하늘 가운데로 노랗게 물들어 갔다.
바람이 이렇게도 산산하였던가.
가을바람은 산산하고
마음은 새털같이 가볍고 여유로웠다.
들은 향기로웠고 꽃은 너그러웠다.
당연히 코스모스의 하늘거림을 빼놓을 수가 없고
어느 담장 너머에는 철 늦은 해바라기가 반기고 있다.
내 기억 속의 아련한 접시꽃도 있었던가.
들국화인지 쑥부쟁이인지가 지천이었지.
하기는 요즘엔 계절이 뚜렷하지 않으니
꽃들도 계절을 가려 피지를 않는다.
시간의 개념이 희미하지만 싫지 않았다.
그 아름다운 시간을
애써 기록하거나 남기려 하지 않으니 여유롭다.
그 적막을, 그 고요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좋았다.
이번 여행은 일상에서의 탈출도 있다.
생각을 내려놓고
무념무상에 빠져들었다.
애써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어줍지 않은 글을 쓰지도 멋진 사진을 찍으려 하지도 않았다.
이제 글은 문학하는 작가들에게 맡기고
사진은 영상 예술가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대신 글쓰기가 아닌 글씨를 썼다.
천천히 먹을 갈아 붓 끝에 집중했다.
어느 것이 일과이고 어느 것이 여행인지
구분이 가지 않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그동안 매인 생활에서의 여행을 떠나온 것이다.
다른 시간을 여행하고자 한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왔다.
사람들 앞에 서서 난 체하기도 했다.
시간과 일과 사람들에게 쫓기기도 했다.
티끌 같은 인생이라고 했던가.
때가 되면 내려놓아야 했고
내려놓기가 어려워 고독과 싸워야 하기도 했다.
이런 것을 욕심이고 아집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순리를 이길 수는 없다.
이번 가을
가을 여행을 다녀오면서
진짜 여행은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훌훌 털고 떠난다는
말은 감히 부담스럽다.
어차피 인생이 여행이니
그냥 주어진 여정을 담담히 걸어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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